성공회대 교수·정치평론가 하노이를 방문한 것은 지난해 11월이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의 사전 답사도, 베트남 축구국가대표팀의 동남아시아 제패 축하와도 무관했다. ‘응옷’의 공연을 비롯해 음악 행사들을 참관하고 현지조사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달달한’ 혹은 ‘단것’이라는 뜻의 이 밴드는 1996년생의 야심찬 뮤지션 탕을 앞세우고 오케스트라까지 대동해서 수천명 관객 앞에서 공연을 했다. 그것도 ‘베트남·소련 우호노동문화궁전’이라는 아주 상징적인 장소에서. 나에게 이런 ‘인디 성공담’은 개발도상국에서 자율, 자주, 자립의 태도를 가지면서도 개방적이고 관용적이고 코즈모폴리턴한 감수성을 가진 새로운 주체가 부상한다는 신호탄이다. 이런 이야기가 뜬금없이 들릴 것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솔직히 나 역시 2차 북-미 정상회담, 이른바 하노이 서밋의 ‘노딜’에 대해 실망, 비애, 분노, 우울을 감추지 못하면서 애써 멀쩡한 척하는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일 뿐이다. 살아온 이력으로 인해 비슷한 경험이 많이 축적되어 생긴 내성이 남들보다 조금 강한 정도다. 그래도 무성한 뉴스를 접하면서 일희일비 가운데 ‘일희’라도 찾아서 정신적 위안을 꾀할 뿐이다. 그 결과는 아래 코멘트 두세 개. 하나. 지금 시점에서 ‘삶은 오래 지속된다’는 경구는 값싼 처세술이나 개똥철학으로 전락하기 쉽다. 그렇지만 이른바 대북제재에 대해 ‘전면 해제’와 ‘최대 압박’이라는 두 극단적 옵션의 시간은 지나갔다. 한반도에서 삶은 양극단 사이 어딘가에서 어떻게든 꾸려질 것이고, 그 과정에서 앞서 언급한 온갖 종류의 감정들, 혹은 그 반대의 감정들이 계속 생산되고 순환될 것이다. 그러니 ‘안보 불감증’이 차라리 정신건강에 좋을지 모른다. 둘. 두 국가 지도자들에 대한 과도한 기대는 접어두자. 양자의 정치적 지향은 물론 문화적 성향은 진부하고 고루하다. 그래도 미 합중국 지도자가 태평양을 횡단한 항로보다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도자가 (동)아시아 대륙을 종단한 육로가 훨씬 참신했다. 김정은의 ‘트랜스아시아 루트’라고 할 만하다. 하노이에서 평양으로 돌아갈 때는 해로를 이용하면 어떨까라는 상상을 해보지만 사정상 힘든 모양이다. 종합적 망상. 트랜스아시아 루트들에 다종다양한 인민들이 연합하는 대안적 일대일로를 구상하는 건 어떨까. 미·일·중·러는 어차피 제국들이니 제쳐놓고 베트남, 홍콩, 타이완, 오키나와, 한반도, 만주, 몽골을 잇는 (동)아시아 연합을 구축하는 것은 어떨까. 오랫동안 제국들 사이에서 낑겨 있던 이곳의 사람들은 간두(竿頭)의 위태로운 삶을 살아낸 공동의 경험들이 있다. 그 삶은 정말 오래 지속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저런 연합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므로 이건 ‘답답해서 한번 해본 생각’ 이상은 아니라는 것을 곧 인정한다. 그래서 응옷의 탕에게 “하노이 서밋에서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 아쉽다”는 메시지를 보내 보았더니, ‘그게 우리 삶의 지속에 큰 영향을 미치진 않는다’는 ‘쿨’한 답이 돌아왔다. 그러고 나서 그들의 대표곡 ‘까호이’(연어)를 다시 들어보았다. 이전에는 ‘물결에 투항해’ ‘흐름을 따라가’라는 가사가 들렸는데, 이번에는 ‘죽은 연어만 흐름을 따라갈 뿐’이라는 가사가 같이 들렸다. 흐름을 따라가면서 흐름을 거스르는 삶. 그게 아시아 코즈모폴리턴의 삶일지 모른다. 오래전 내가 코즈모아시안(CosmoAsian)이라는 어색한 조어를 만들면서까지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건 힘이 없어’라고 많은 사람들이 말할까? 아니다. 오히려 강인하고 지속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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