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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난지도, 시간의 역류를 꿈꾸는 땅 / 배정한

등록 2019-03-08 16:33수정 2019-03-08 22:52

배정한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꽉 짜인 일상 속에 우연한 여백의 시간이 찾아든다면, 한강을 따라 서울을 동서로 가로지르다 갑작스레 탈주의 충동을 느낀다면, 하늘공원을 권하고 싶다. 쓰레기산 난지도 정상에 만든 하늘공원은 전통적인 공원과 전혀 다르다. 키 큰 나무로 우거진 낭만의 언덕, 그림 같은 녹색의 잔디 카펫, 거울처럼 평온한 호수가 조합된 전형적인 공원 풍경이 아니다. 하늘공원은 척박한 땅에서 어떻게 자연의 생명력이 다시 부활하는지 온몸으로 깨닫게 해주는 숭고의 경관이다. 광활하게 펼쳐진 초지에 하늘이 직접 맞닿아 있다. 서울에서 산이나 건물이 시야에 걸리지 않으면서 온전히 하늘만의 경관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 일상의 번잡함을 잠재우는 아름다운 노을을 만날 수 있다. 억새와 띠의 거친 물성이 빚어내는 생소한 질감은 잠자고 있던 우리의 촉각을 일깨운다.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풀은 소리의 풍경을 선물한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한강의 냄새를 실어 나른다. 서울 같은 거대 도시에서 경험하기 힘든, 시각·청각·후각·촉각이 한데 뒤섞인 공감각적 풍경이다.

요즘 세대는 하늘공원 자리의 옛 지명 난지도를 들어본 적이 없다. 적어도 40대 이상이라야 난지도를 쓰레기산으로 어렴풋이 기억할 것이다. 난지도는 1978년부터 15년간 서울의 온갖 오물과 폐기물을 받아내던 쓰레기 매립지였다. 초등학교 시절, 피부색이 유달리 까무잡잡한 아이는 어김없이 ‘난지도’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친구들은 아마 연탄재로 가득한 난지도가 어디 있는지 잘 몰랐을 테지만, 난지도가 서울에서 가장 시커먼 동네라는 건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난지도는 본래 도시의 탐욕이나 배설과는 관계가 없던 아름다운 섬이었다. 난지(蘭芝)는 난초와 지초를 합한 말로, 난과 지는 모두 은근한 향기를 지닌 꽃이다. 철 따라 온갖 꽃이 만발해 ‘꽃섬’이라 불리기도 했다. 김정호의 옛 지도에는 꽃이 피어 있는 섬이라는 뜻의 ‘중초도’(中草島)라 적혀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는 난지도를 강을 타고 굽이굽이 바닷물이 거슬러 오는 길목에 굵고 단단한 모래로 다져진 살기 좋은 터로 꼽고 있다. 이상적 삶의 터전 난지(蘭芝)가 도시화의 배설물을 받아내는 난지(亂地)로 뒤바뀌어 지난(至難)한 삶의 공간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불과 15년 만에 난지도에는 높이 100m, 둘레 2㎞의 거대한 쓰레기산 두개가 생겨났다. 매일 트럭 3000대 분량의 생활쓰레기, 건설폐자재, 산업폐기물, 하수슬러지가 쌓이고 묻혔다. 무려 9200만톤이었다. 소설 <난지도>에서 정연희는 그 절망감을 이렇게 표현한다. “쓰레기산 위로 쏟아져 내리는 불볕은 저주였다. 그것은 앙심이 되었다. 쓰레기 더미는 죽음의 산이다. 인간의 삶에서 부스러기가 되어 나온 주검들의 산이다. 그 산에는 살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맹렬하게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썩어가는 일과 썩어가는 냄새뿐이다. 그것만이 죽음도 정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1993년, 난지도 매립장은 썩은 쓰레기의 침출수, 악취, 유해 가스 등 포화 상태의 오염원을 남긴 채 폐쇄됐다. 버려진 이 지난의 땅을 되살리는 복잡한 공정의 프로젝트가 뒤를 이었고, 마침내 쓰레기산은 친환경 재생 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시간의 급류 속에서 우리의 기억으로부터 멀어진 땅 난지도, 이 땅에 묻힌 두꺼운 시간의 지층을 기억하며 우리는 시간의 역류를 꿈꾸는 반역을 모의한다. 하늘공원은 난지도에서 피어나고 있는 새로운 희망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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