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처음 접했을 때 매우 낯설게 느껴졌던 말은 크리에이터(creator)였다. 유튜브를 플랫폼으로 하는 1인 미디어가 지상파나 케이블 방송조차 위협하는 뉴미디어 시대에, 크리에이터는 종래의 예술상의 창작자 개념과는 거리가 먼, 디지털 콘텐츠를 제작하고 업로드하는 주체 개념으로 쓰인다. 유튜브를 통해서 구하기 힘든 음악 정도를 듣는 나로서는 아동과 청소년들이 열광하는 먹방이나 진기해 보이는 오타쿠적 행위, 게임 중계 등을 접해본 바가 별로 없다. 마음을 안정시킨다는 자율감각 쾌락반응(ASMR) 소리 같은 경우도 솔직히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커뮤니케이션 장의 변화, 기술적 혁신과 새로운 디지털 플랫폼의 등장, 대중들의 문화적 실천 및 향유는 불가역적인 성격이 있기 때문에 발명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가령 스마트폰이 신체 혹은 장기의 일부로 간주되는 세태에서, 학교에서 그것의 사용을 인위적으로 중단시키거나 금지한다면, 이는 일종의 처벌과 단죄의 성격을 띠게 되어 강한 반발을 초래한다. 그렇다고 해서, 뉴미디어에 기반한 새로운 플랫폼에의 과잉된 몰입을 불가피한 것으로만, 혹은 자연스러운 적응 및 활용에 따라 자율적 이용규범이 형성될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특히 유소년에서 청소년기에 이르는 시기의 미디어 체험과 일상적 활용의 누적된 관성은 제2의 천성 비슷하게 체화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교육적 관점에서도 고민될 필요가 있는 사안이다. 아마도 나는 신문, 잡지, 책으로 상징되는 인쇄출판문화의 강력한 영향 속에서 성장했으면서도, 20대 이후 인터넷의 등장과 휴대전화에서 스마트폰에 이르는 현재의 문화적 변모와 이행 모두를 경험한 세대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낡음/새로움의 잣대로 “새로운 것은 좋다” “과거는 위대하다” 식의 이분법 모두에 동의하지 않는 문화적 ‘낀세대’라고 느낀다. 그런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뉴미디어와 기술적 혁신이 초래하는 변화에서 긍정성을 찾다가도, 그것의 과잉에 대해 걱정하기도 하는 이율배반을 자주 경험한다. 특히 교육의 장에서는 크게 의식된다. 교육이라는 장은 혁신적 미디어를 활용한다고 해도, 그 출발점 혹은 본질에 있어서는 문헌을 읽고, 쓰고, 사유하는 일이 출발점이다. 그런데 문헌을 읽고, 분석하고, 쓰는 언어 지력(知力)이 대학생들조차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다. 한 수업에서 25명의 학생들에게 가정에서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 단행본 등을 자발적으로 구독하거나 구입해서 읽은 경험이 있는가라고 물어보니, 단 2명의 학생이 손을 들었다. 조별 토론을 진행하면서 학생들이 서로를 소개하고, 주제와 관련해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보니, 본격적인 토론에 들어가기 전에 앞서 ‘단톡방’을 만들고 거기에 자신의 정보를 기입하는 일이 자주 보였다. 수업 중에 마무리 못한 공동의 작업을 단톡방에서 진행하려는 의도이겠지만, 흔히 호소하는 학생들의 괴로움은 단톡방에 글을 올려도 반응이 없는 학생들이 많다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특정한 학생만 프로젝트의 부담을 지게 된다는 것이다. 미디어의 기술적 진보가 실세계에서의 커뮤니케이션과 지식습득의 깊이와 역량, 협력적 작업을 자동적으로 강화시키지는 않는다. 올드미디어건 뉴미디어건 문해능력의 습득과 활용에 대한 체계적 교육이나 준거가 없다면, 가장 진보된 미디어 환경 속에서, 역설적으로 21세기 특유의 반지성주의가 병존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뉴미디어를 통한 신속한 정보접근/검색 능력과 전파력은 효율성을 갖지만, 일상생활에서의 정신분산적 상황의 구조화와 자동화된 자극/반응 메커니즘은 성찰능력을 저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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