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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공원의 리얼리티와 판타지 / 배정한

등록 2019-04-12 18:11수정 2019-04-12 19:05

배정한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결국 봄이 왔다. 다시 공원이 북적인다. 도시의 삶에서 공원만큼 소중한 곳이 없지만, 공원의 어깨는 항상 무겁다. 공원은 녹음과 안식이 가득한 평화의 공간인 것 같지만, 실은 버거울 정도로 다양하고 복잡한 ‘사회적’ 역할을 해내야 한다. 공원은 아침형 인간이 하루를 여는 조깅 코스다. 아이의 등교 전쟁을 치르고 난 주부의 해방구다. 오전 내내 모니터 앞에서 시달린 직장인이 잠시 햇볕을 쬐며 커피를 즐기는 카페테리아다. 평범한 주말의 나른한 휴식을 담는 그릇이다. 갈 곳 없는 노인의 의자이자 가난한 연인의 밀실이기도 하다. 공원은 또한 유치원 꼬마들의 소풍으로 가득하다. 설레는 웨딩 촬영의 무대로 변신하기도 한다. 자연 관찰은 물론이고 전문적인 환경교육도 공원에서 진행된다. 때로는 전시장으로, 공연장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현대 도시의 여러 공간 중 공원만큼 복합적인 성능을 갖춘 멀티플레이어가 또 있을까. 하지만 다중의 역할이 힘겹게 중첩된 만큼 공원에는 다양한 이념과 가치가 위태롭게 동거하고 있다. 공공을 위한 문화 프로그램도 풍성해야 하고, 생태적으로 작동하는 건강한 자연도 제공해야 한다. 개인적 욕망보다는 늘 사회적 가치가 우선이다. 우리는 가득하지만 나는 없는 곳, 공원의 리얼리티.

공원은 도시가 잃어버린 어떤 것에 대한 집단적 노스탤지어이자 도시가 지향하는 어떤 것에 대한 사회적 비전이다. 그러나 공원에는 그 어떤 것에 대한 ‘개인적’ 판타지도 중첩되어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누구나 자신만의 장소에 대한 열망과 환상을 가지고 산다. 집과 직장 밖의 생활 세계에서 자기 공간을 소유하고 이용할 수 있는 개인은 많지 않다. 자본주의 도시의 평범한 시민에게 허락된 거의 유일한 야외의 장소는 공원이다. 한 조사 결과를 보니, 많은 사람들은 가정에서 가지지 못하는 프라이버시를 찾고 싶어서 공원을 선택한다. 남과 함께 쓰는 공원이지만 그 안에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고 싶은 열망. 일상 속에서 나만 아는, 비밀스러운, 작은 놀라움과 기쁨을 주는 장소에 대한 환상. 그것은 판타지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욕구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일상에서 일상의 탈출을 경험할 수 있는 공원. 그러나 공원의 리얼리티는 탈출의 판타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공원에서 꿈꾸는 또 하나의 판타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가 아닐까.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쓸모 있는 어떤 것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장소에 대한 동경. 우리는 거의 모든 일상을 ‘쓸모’에 바치며 산다. 먹고 자고 일하고 사랑하는 모든 생활이, 심지어 휴식과 운동도 유용성, 실용성, 효용성의 지배를 받는다. 공원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쓸모에 복무하는 우리의 삶은 공원에서도 쓸모만을 찾게 한다. 쓸모 있는 공원에서 쓸모 있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을 안고 사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공원은 쓸모와의 거리가 충분할 때 성립할 수 있다. 그곳은 쓸모없는 시간을 허락하는 품위 있는 공간이다.

공원을 배꼽에 비유한 이어령의 공원론은 다시 떠올려도 늘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도시는 우리의 제2의 신체다. 그 신체 기능이 서로 어울려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빈(void) 공간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배꼽이다. 옴파로스다. 어떤 도시든지 가장 쓸모없고 불필요한, 공허의 공간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빈 공간이다. 비어 있기 때문에 전체가 사는 것이다. 우리 배꼽하고 똑같다. 우리 신체 중에 제일 일 안 하고 아무 쓸 데 없는 것이 배꼽인데, 그것이 중앙에 있다. 이 중심의 공간 옴파로스, 그것이 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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