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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붉은 벽돌로 들어간 파란 물병 / 배정한

등록 2019-06-07 17:44수정 2019-06-07 18:57

배정한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뉴욕 타임스>가 “커피계의 애플”이라고 부른 ‘블루보틀’(Blue Bottle Coffee) 한국 1호점이 지난달 3일 요즘 가장 ‘힙’한 동네인 서울 성수동의 한 붉은 벽돌 건물에 문을 열었다. 이 건물에는 원래 식당, 노래방, 검도장, 마사지 숍, 통신사 대리점, 고시원이 있었는데, 한 패션 브랜드가 새 소유주가 되면서 모든 세입자를 내보내고 성수동 경관의 상징 격인 붉은 벽돌로 외피를 바꿨다. 개점 첫날에는 평균 4시간30분을 기다려야 커피 맛을 볼 수 있었고, 한 달이 지난 지금도 30분 가까이 인내해야 매장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붉은 벽돌 앞에서 파란 물병이 그려진 테이크아웃 잔을 들고 있는 인증 사진들로 소셜미디어가 떠들썩하고, 부동산업계는 벌써 ‘블’세권이라는 말까지 지어냈다.

주문을 받으면 로스팅한 지 48시간이 넘지 않은 커피 60그램을 바리스타가 일일이 갈아서 94도의 물로 내린다. 와이파이도, 콘센트도 없다. 온전히 커피만을 위한 공간을 추구한다는 전략이다. 그러나 핸드드립 커피 한 잔을 위해 뙤약볕을 견디며 인산인해의 줄서기를 마다하지 않게 하는 힘이 커피 맛 자체에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지루한 줄서기를 즐거움으로 변환시켜주는 힘은 남보다 먼저 해보고 그 경험을 시각적으로 인증하고 싶다는 욕망일 것이다. 이런 현상을 설명하는 데 적당한 형용사로는 신조어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mable: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미디어에 올리기 좋을 만큼 시각적 매력이 있다는 뜻)만 한 게 없다.

지난 한달간 블루보틀 현상을 두고 밀레니얼세대와 Z세대의 비합리적 소비문화와 소셜미디어 의존성을 비판하는 기사가 쏟아졌다. 과시나 허영이라고 재단해버릴 게 아니라, 성취의 희망이 사라진 세대의 절박한 자기표현이라고 봐야 한다는 해석도 있다. 보다 설득력 있는 심층 진단과 토론은 사회학자와 심리학자의 몫일 것이다. 환경미학과 도시경관 연구자로서 나는 조금 다른 각도의 질문을 던지고 싶다. 블루보틀 1호점은 왜 붉은 벽돌 건물을 선택했을까.

1970~80년대의 경공업 중심지였던 성수동 일대에는 붉은 벽돌로 지은 쇠락한 공장과 창고, 노후한 연립주택이 즐비하다. 폐기된 공장을 개조한 카페와 복합문화공간이 2000년대 중반부터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변화의 촉매가 된 ‘대림창고’에서 단적으로 볼 수 있듯, 부서져가는 붉은 벽돌 건물의 외피만 그대로 두고 그 내부는 거친 질감의 콘크리트, 철제 파이프의 잔해, 오래돼 보이는 최신 가구로 구성하는 디자인이 재생의 획일적 공식으로 자리 잡았다. 남기고 다시 살린 것은 장소에 새겨진 삶과 문화의 무늬가 아니다. 붉은 벽돌과 콘크리트를 얼기설기 조합해 새로 빚어낸 경관을 성수동 고유의 장소성이라고 볼 수 있을까. 브루클린이나 포틀랜드의 어느 골목을 뚝 떼어 온 것 같은 동질화된 풍경은 장소성의 재생이라기보다는 피상적인 미감의 재현에 가깝다.

범지구적으로 연결된 미적 취향을 반복적으로 재현하면서 낡음에 대한 향수를 상품화하고 있는 성수동 한가운데에 “커피로 세계를 연결한다”는 경영 슬로건을 내걸고 들어선 블루보틀. 쇠락한 서울 곳곳의 골목 상권에서 상업적 도시 재생이 성패를 거듭하고 있다. 성수동이 반짝 떴다가 지리멸렬했던 수많은 ‘~로수길’과 ‘~리단길’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또 북촌이나 익선동 같은 한물간 디즈니랜드가 되지 않아야 한다면, “서울의 브루클린”이라는 구호부터 폐기해야 한다. 표피만 붉은 벽돌로 덧댄 건물로 들어간 샌프란시스코 출신 블루보틀이 성수동의 도시 재생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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