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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폴린 케일, 어느 비평가의 초상 / 김영준

등록 2019-06-21 18:14수정 2019-06-21 23:29

김영준
열린책들 편집이사

“중고생 시절, 미국의 ‘물질주의’를 공격하는 사람들을 처음 의심하게 된 계기는 히틀러를 피해 건너온 망명자들이 제공했다. 그들은 걸핏하면 자기들 ‘문화’를 우리 ‘천박한 물질주의’와 대비시키곤 했다. 들여다보니 그들의 ‘문화’라는 건 유럽 시절 하인을 부리고 살았다는 것과 그들이 황홀해하는 릴케, 슈테판 츠바이크, 브루크너, 말러에 대한 지식 정도가 다였다. 그들이 말하는 ‘문화’가 신세계에서 형편만 허락한다면 제대로 누리고 싶은 중산 계급식 물질주의와 감상주의를 뜻할 뿐이라는 걸 발견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폴린 케일, 1964)

문화가 자기편에 있다고 믿기 시작하면 보통 이상의 어리석음에 빠지게 마련이다. 소녀 폴린의 눈에 비친 고상한 중유럽 망명자들의 모습은 유효하지 않은 은행권을 흔들며 화를 내는 졸부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나중에 그녀는 문화든, 윤리든, 깜찍한 최신 예술 사조든 주머니에서 화폐처럼 꺼내 흔들어 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한칼에 베어 버리곤 했다. 영화 평론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6월19일은 마침 ‘미국 제1의 평론가’였던 그녀의 탄생 100돌이 되는 날이다.

전설에 따르면 케일은 1953년 채플린의 <라임라이트>를 보고 카페에서 친구와 큰 소리로 논쟁하다가, 이를 듣고 감탄한 잡지 편집자의 의뢰로 처음 영화평을 쓴다. 여기서 가장 많은 것을 말하는 단어는 ‘친구’이다. 그녀는 늘 친구를 대동하고 영화를 보러 갔다. 나중에 제일 놀란 게 평론가들(주로 남자)이 혼자 영화 보러 다니는 것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윌리엄 허트의 빨간 스카프가 터무니없다든지(<거미 여인의 키스>) “키 큰 제임스 윌비 옆에 서니 더 작고 머리는 커 보이는 루퍼트 그레이브스”(<모리스>) 식의 귀여운 코멘트에는 극장을 나서며 친구에게 건네는 말 같은 생생함이 있다.

어떤 주의나 이론에 의지하지 않았다는 것, 맨땅에 헤딩하듯 자기 느낀 대로만 썼다는 것, 겁도 없고 양보도 없었다는 것은 하나의 특질―자유든, 정직이든―을 여러 다른 말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 말해 왔고 그게 사람들의 존경을 얻을지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말년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친구의 기분을 맞춰 줄 목적이라면 평론을 쓸 이유가 없다. 정중한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지금 걸린 영화 중 그나마 가장 낫다면 좀 봐줘야 하지 않을지, 같은 생각은 1초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평론집은 영화 또는 도덕에 대해 잠깐 안이한 생각을 한 죄로 영혼까지 탈탈 털리는 불쌍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방금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라고 쓰긴 했지만 늘 그렇지는 않았다. 드물게 감동받거나 열광적인 무드가 되면, 웬만한 건 넘어가기도 했다! 즉 케일의 반응은 예측하기 어려웠다. 대체로 재능 있는 젊은이의 미숙함(과잉)에는 호의적이었지만, 완전히 노장이 되어 반복되는 결함이 하나의 잔꾀가 되어 버린 사기꾼(스타일리스트)들에게는 냉혹했다고 할 수는 있겠다.

케일의 영역은 영화였으니 그녀가 모든 영역의 평론가의 귀감이라는 식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평론가는 그녀와 반대되는 특질들의 총합과 닮았다. 아마 그는 이념으로 판단하고, 직감보다는 이론에 의지하고, 업계 상황과 평론의 파장을 신중히 고려하고, 동료와 자신의 경력을 보호할 것이다. 즉 안 읽어도(또는 읽어도) 지장 없는 글만 쓸 것이다. 아, 문화의 수호자를 자처하기도 할 것이다. 생각해 보면 끔찍한 모습이다. 그러나 그리 낯선 모습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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