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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철도 폐선부지 공원의 힘 / 배정한

등록 2019-07-05 17:40수정 2019-07-05 19:07

배정한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20세기의 동력을 잃은 도시는 대수술을 경험하고 있다. 공장 이전지, 쓰레기매립지, 방치된 오염지, 폐기된 토목구조물, 버려진 항구와 창고 등 근대 도시의 발전과 진보를 이끌었던 산업 시설과 공간이 이제 지혜로운 재생의 처방을 기다리고 있다. 계속 늘어나고 있는 철도 폐선부지도 같은 맥락에 있다. 폐선부지 대다수는 사실 이름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다. 잡풀에 뒤덮여 방치되기 일쑤고, 재개발 과정에서 새 도로와 건물 아래에 묻혀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몇몇 도시에서는 폐선부지를 공원으로 탈바꿈시켜 도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시도가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근대 문명의 동력이자 자본주의적 시공간 압축의 촉매였던 철도. 그 속도가 멈춰버린 채 남겨진 땅이 곧 폐선부지다. 철도의 유산을 흔적 없이 지워버리지 않고 새 생명을 부여하는 도시재생에서 공원은 매우 전략적인 해법이다. 공원을 통해 지난 시대의 기억을 보전하고 옛 시간의 상처를 치유함은 물론, 주변 도시 조직의 질서를 다시 다듬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폐선부지는 선형이라는 힘을 가지고 있다. 선형의 링크는 도시의 기능을 원활하게 작동시켜 준다. 현대 도시에 필요한 공원은 고립된 섬과 같은 녹색 별천지가 아니라 도시를 관통하며 흐르는 혈관 같은 공원이다. 철도 폐선부지는 선형의 공원을 도시에 접속시켜주는 잠재력을 지닌다.

국내에서도 도시 폐선부지를 공원화하는 프로젝트가 큰 사회적 반향을 낳고 있다. 이미 1990년대 말 광주역에서 광주 남구 효천역에 이르는 11㎞의 폐철길이 광주푸른길공원으로 변신하면서 근대 산업 유산의 재활용, 도시 공간의 공공성과 사회적 가치, 시민 참여 등 다양한 이슈가 생산됐다. 부산의 동해남부선 철길을 따라 조성된 그린레일웨이에서는 청사포에서 해운대로 이어지는 절경의 극단을 경험할 수 있다. 경의선의 흔적과 기억을 되살린 서울 경의선숲길공원은 ‘연트럴파크’라는 별명을 얻으며 쇠락한 연남동 일대를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게 했다. 지난 5월에는 6㎞에 이르는 경춘선숲길공원이 완공돼 시민의 소중한 산책길로 인기를 얻고 있다.

폭우가 내린 지난 주말, 옛 마산시 구도심의 ‘임항선 그린웨이’를 걸었다. 임항선은 경전선 마산역에서 마산항역을 잇는 철도로 1905년에 개통돼 주로 화물 수송에 쓰이다가 2011년에 폐선됐다. 5.5㎞의 폐철길을 선형 공원으로 바꾼 임항선 그린웨이는 소박하고 여유로운 산책길 그 이상이었다. 이 공원은 마산이라는 도시의 삶과 풍경을 가로지르고 역사를 세로지른다. 대나무숲을 통과해 치자꽃 향기를 맡으며 공원을 걷다가 마산의 근대를 이끈 마산항과 옛 마산세관을 만날 수 있다. 시간의 때가 내려앉은 오래된 주택들의 지붕이 발아래로 펼쳐지는가 하면 삐죽삐죽 올라온 아파트가 시야에 뒤섞이기도 한다. 고려시대의 우물 몽고정이 등장하고 3·15의거 김주열 열사의 인양지가 나타나는가 하면 일상의 속살 그대로의 회원철길시장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비에 젖어 무거운 발걸음을 잠시 돌려 그린웨이 중간 지점 추산동 언덕의 문신미술관으로 향했다. 파리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문신이 평생을 바쳐 가꾼 정원, 그의 힘찬 조각 작품들에 넋을 잃다가 시선을 돌렸더니 마산 앞바다다. 어린 시절 숱하게 들어봤지만 직접 불러본 적은 없는 마산의 노래 ‘가고파’(이은상 시, 김동진 곡)가 나도 모르게 입에서 터져 나왔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요 그 잔잔한 고향 바다….” 낯선 도시의 공원을 산책하며 여름을 이겨낼 힘을 얻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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