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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공정한 프듀’는 없다 / 오연서

등록 2019-07-28 18:14수정 2019-07-29 09:32

오연서
24시팀 기자

지난 6월, 홍대 앞 거리에 검은 마스크에 검은 옷을 입은 여성이 대형 종이 팻말을 목에 걸고 등장했다. 팻말에 적힌 문구는 ‘오늘 23시까지 패자부활전 투표 부탁드려요’. 이 여성은 선거 캠페인에 나선 운동원처럼 시민들에게 응원 팻말을 나눠줬다.

화제의 프로그램인 엠넷의 <프로듀스 엑스 101>(프듀)이 만들어낸 한 풍경이다. 이른바 ‘국민 프로듀서’라고 불리는, 시청자들의 투표만으로 연습생 101명 중 11명을 뽑아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시키는 프로그램이다. 프듀 시즌4에서 문자투표 수는 무려 140만건을 돌파했다. 지난 5월부터 두달여간 팬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연습생을 광고하는 지하철 전광판을 내걸고, 평소 연락이 뜸하던 친구에게까지 투표를 권유하는 ‘영업 전쟁’을 벌였다. 아들에게 투표해달라며 직접 팻말을 들고 거리에 나온 연습생 아버지도 있었다.

그런데 지난 19일 시청자들의 유료 문자투표 결과가 조작됐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경연에 참여한 1위부터 20위까지 연습생들의 최종 득표수가 ‘7494.442’라는 특정 숫자의 배수로 반복된다는 것이다. 데뷔 멤버를 미리 정해두고 득표수를 짜맞춰 조작한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분노한 팬들은 엠넷에 ‘투표수 원데이터를 공개하라’며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했다. 직접 변호사를 선임해 제작진을 검찰에 고발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엠넷은 24일 “득표수로 순위를 집계한 후, 각 연습생의 득표율도 계산해 최종순위를 복수의 방법으로 검증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다. 그러나 최종순위에는 변화가 없다”고 해명했다. 26일엔 “공신력 있는 수사기관에 수사를 의뢰하겠다”는 입장을 재차 내놨다.

하지만 ‘국민 프로듀서’들의 분노는 식지 않고 있다. ‘<프로듀스 엑스 101>이 오로지 국민 프로듀서의 투표를 통해 글로벌 아이돌을 데뷔시킨다는 취지로 진행됐기에 투표 결과의 투명성과 신뢰도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투표 조작은 시청자에 대한 기만이고, 101명 연습생의 땀과 눈물을 농락한 용서할 수 없는 행위다.’ 24일 진상규명위원회가 한국어·영어·중국어 등 3개 국어로 내놓은 성명문의 일부다. 엠넷도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사실관계를 명확히 밝히겠다”고 밝혔다.

제작진이 수사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밝혔지만, 프로그램의 ‘불공정 논란’이 완전히 해소될 수 있을까. 이 프로그램은 기본적으로 ‘불공정함’을 기초로 운영된다는 사실을 팬들은 잘 알고 있다. 101명의 연습생에게 방송 분량을 공정하게 배분하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방송에 많이 노출되는 연습생은 인지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악마의 편집’을 당해 순위가 떨어지는 연습생이 생길 수도 있다. 투표 결과 조작 논란 이전부터 팬들은 이런 문제를 지적해왔다.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연습생들 개인의 매력을 투표라는 방식으로 우열을 가릴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개인의 개성에 등수를 매기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한 명의 아티스트가 될 이들의 잠재력과 퍼포먼스를 두고 ‘국민의 선택’이란 이름으로 1등부터 101등까지 등급을 나누는 방식이 과연 ‘공정’한 걸까.

그런데도 이 프로그램의 진행자는 “다음주에 여러분의 ‘원픽’(시청자가 선택한 연습생)이 방출될 수 있다”며 시청자들의 투표 참여를 자극한다. 자신이 응원하는 연습생이 당장 다음주부터 탈락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청자들은 ‘영업 전쟁’에 뛰어든다. 아티스트 개인의 개성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순위가 낮다’ ‘방송 분량이 적다’고 호소하는 ‘간절함 경쟁’만 남는다.

결국 프듀에서의 투표는 시청자 참여를 강제해 프로그램의 화제성을 높이려는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여기에 연습생 개인과 팬들에 대한 어떠한 존중도 찾아볼 수 없다. 왜 우리가 우리의 예술적 선호를 그들을 통해 검증받아야 하는가. 투표 공정성보다 먼저 생각해야 하는 건 이런 것 아닐까.

lovelett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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