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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서소문역사공원에서 / 배정한

등록 2019-08-02 17:56수정 2019-08-02 19:05

배정한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뜨거운 물속을 걷는 것 같은 장마철 출근길. 끈적끈적 찌뿌둥 후덥지근한 시절은 오히려 몸을 써서 이겨내야 하는 법. 연구실 에어컨의 유혹을 뿌리치고, 개장 두 달이 넘도록 미뤄둔 서소문역사공원 답사에 나섰다.

도시의 모든 공간에는 시간의 켜와 기억의 겹이 쌓여 있기 마련이지만, 서소문역사공원이 들어선 땅만큼 복잡한 사건과 기구한 사연이 뒤엉킨 곳은 드물다. 서소문 밖 네거리 일대는 분주한 시장이자 잔혹한 형장이었다. 17세기부터 칠패시장과 서소문시장이 번성했고, 중국으로 향하는 육상 교통로에 접해 있어 한양도성 밖의 대표적인 상업 중심지로 발전했다. 조선시대의 국가 중죄인들을 처형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홍경래의 난과 갑신정변의 국사범들이 이 형장에서 죽임을 당했고, 손화중과 김개남을 비롯한 동학농민혁명의 여러 지도자가 참형됐다.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인박해를 거치며 천주교 신자 100여명도 이곳에서 처형당했다.

콘솔레이션 홀. 배정한 제공
콘솔레이션 홀. 배정한 제공
일제강점기에는 수산청과시장으로 쓰이기도 했다. 일제의 근대 도시계획에 따라 인근의 한양도성 성곽과 함께 서소문이 철거됐고 경의선이 통과하게 됐다. 1960년대에는 서소문로를 따라 고가 차도가 놓였고 그 뒤에는 고층 건물들에 둘러싸이면서 이 장소에 얽힌 시간과 기억은 깊이 파묻혔다. 섬처럼 고립된 땅에 근린공원(1976년)이 들어서고 천주교 성지임을 알리는 현양탑(1984년)이 세워졌지만, 공원 지하에 쓰레기 처리장, 공용 주차장, 꽃 도매상이 계속 덧붙여진 채 쓰레기 악취와 철도 소음 속에 방치되어 왔다. 2011년 서울대교구가 ‘서소문밖 역사유적지 관광자원화 사업’을 중구청에 제안하면서 변신 프로젝트가 시작됐고, 2014년의 설계공모를 거쳐 올해 6월1일 지상 1층 지하 4층의 복합문화공간인 서소문역사공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삶과 죽음이 교차한 이 땅의 콘텍스트를 잠시 괄호 안에 넣고 새 텍스트에만 집중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지상의 공원에서 자연스럽게 유도되는 동선을 따라 지하의 음각 공간들을 유람하다 ‘콘솔레이션 홀’에 몸을 맡겼다. 낯선 스케일과 비례의 정육면체 공간, 높이 12m의 거대한 벽면 네 개가 바닥에서 2m 떠 있는 형태다. 그 중심을 비추는 조명 아래에 앉아 네 벽면에 투영되는 파도치는 바다 영상을 바라보며 멀리서 들려오는 모차르트의 레퀴엠에 취해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하늘광장. 배정한 제공
하늘광장. 배정한 제공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좁고 긴 수로를 따라가다 낮은 유리문을 열면 지하 공간의 종착지인 ‘하늘광장’이 나온다. 땅속 깊이 파묻힌 공간이지만 하늘이 뻥 뚫린 텅 빈 광장. 아마도 건축가 윤승현(인터커드)은 이 침묵의 광장에서 죽음이 희망으로, 기념성이 일상성으로 전이되기를 의도했겠지만, 나는 붉은 벽돌 벽의 무심한 물성 위로 쏟아지는 정사각형 하늘의 순수한 공간감에서 위안과 해방을 경험한다. 광장의 벽 한편에는 순교 성인 44인을 상징하는 정현의 조각 <서 있는 사람들>이 슬픔이나 무거움을 강요하지 않은 채 작품 제목처럼 당당히 서 있다.

고요하면서도 나른한 반나절의 여름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괄호에 가둬두었던 이 땅의 콘텍스트를 다시 꺼냈다. 도시의 공간은 선택받은 기억만으로 편집되는 지면이다. 서소문역사공원에서 선택된 것은 천주교 순교의 기억이고 누락된 것은 시장과 동학의 기억이다. 그러나 철저하게 삭제된 가장 최근의 기억 하나가 더 있음을 잠깐의 검색만으로도 알 수 있다. 이곳은 아이엠에프(IMF) 경제 위기 이후 몰려든 수많은 노숙인의 애달픈 쉼터이기도 했다. 이제 그들은 편집이 반복되는 이 도시의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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