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책들 편집이사 내가 본 가장 인상적인 저자 소개는 르네 웰렉이 편집한 <도스토옙스키 논집>(1963) 끝에 실려 있는 것이다. 필자 열한명의 약력은 서너 줄로 끝나는 것, 그보다 좀 긴 것 등 다양하지만 ‘프로이트’ 밑에는 단 세 마디가 할애되어 있다. ‘소개할 필요 없음.’ 며칠 전 중쇄를 찍은 책이 있어서 살펴보다가 아는 역자의 약력이 바뀐 것을 알게 되었다. 담당 편집자에게 확인하니, 역자가 교체를 요구하셨다고 한다. 근황이 추가된 것은 없고, 출생 연도, 출생지, 출신 학교, 이 세 가지가 빠졌다.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최근의 흐름이라는 것이다. 나이(생년)를 빼달라, 고향을 빼달라, 학교를 빼달라, 또는 약력을 아예 감성 에세이처럼 쓰면 안 되냐 등등의 요구를 간혹 받고 있다. 이때마다 난감함을 느끼는데, 이처럼 전격적으로 주요 신원 정보를 싹 정리한 것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왜 빼려 하는가? 문제는 출신 학교와 출생지와 나이가 지나치게 민감한 정보라는 데 있다. 이것들은 모두, 밝히는 순간 학벌주의와 지역주의와 연령주의에 편입되는(즉 편승하거나 피해자가 되는) 구조를 갖고 있다. 보신 분들도 있겠지만 80년대까지 문방구에서 파는 이력서에는 사진 옆에 ‘출신 도’를 적는 큼직한 난이 있었다. 아래쪽에 상세 출생지를 적는 곳이 있는데도 위쪽에 도(道)를 따로 적게 한 것은 수작업의 편의성 때문이었다. 어떤 수작업이었을지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불과 30여년 전까지 딱 그 정도 수준이었던 사회에서 모든 차별의 가능성에 대비하고 민감해져야 하는 것은 하나의 의무가 된다. 그리고 이런 이슈와 다른 차원의 문제도 하나 생겼다. 지금은 개인정보를 스스로 지켜야 하는 시대인 것이다. 필자가 모든 출판 편집자를 대표할 수는 없으니 개인적인 의견만 말하겠다. 학벌주의, 지역주의, 연령주의에 대한 반대와 개인정보 보호라는 대의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러나 저자 또는 역자가 책에 싣는 신상 정보를 생략할 수 있다는 의견에는 반대한다. ‘단호하게’ 반대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논쟁거리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책에 있는, 특히 간기면(판권 페이지)에 있는 저·역자 약력란은 애초에 필자의 신상을 공개하기 위해 있는 것이지 다른 목적으로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병원이든 약국이든 부동산중개업소든 방문하면 눈에 띄는 곳에 면허증이 걸려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책의 저자가 되기 위해 면허증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책을 썼으면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공개해야 하는 것이다. 책은 소셜미디어 계정이 아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신상을 밝히고 싶지 않거나, 사생활 침해를 받을까 걱정하면서 책을 낸다면 주소를 잘못 찾아온 것이다. 신참 때 어느 저자가 보내온 장황한 약력을 편집할 일이 있었다. ‘사실만 남길 것’이라는 지침을 받았지만 어려운 주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대표의 빨간 줄이 쳐져 되돌아와 있었다. “‘근간’ 같은 건 넣지 마라.” “한달 뒤에 나올 책이라고 하셔서요.” 대표가 반문했다. “아직 안 나온 책이면 아직 사실이 아니지 않나?” 핵심은 책의 저·역자 소개가 자기표현의 공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책 내용의 신뢰성을 보증하는 공간일 뿐이다. 백 퍼센트 보증된다고 하지는 않았다. 다만 저자가 자신을 공개할 마음이 없으면 신뢰성 보증은 출발도 할 수 없다. ‘그건 문제가 아니다, 나는 오직 책의 내용으로 승부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저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독자 입장에서는 저자 약력이 쓰여 있는 방식을 보면 책 속에서 사실이 어떤 취급을 받을지 예감하게 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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