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훈 ㅣ 통일외교팀 선임기자
“아버지, 엄마~!”
한 할머니가 갑판 난간을 부여잡고 칠흑 같은 바다로 울부짖듯 외친다. 1998년 11월19일 이른 새벽 첫 금강산 관광선 ‘현대 금강호’. 전쟁 통에 손을 놓친 부모를 목놓아 부르는 할머니. 금강산을 휘돌아 동해로 쏟아지는 바람이 맵차다.
남녘 관광객 826명을 태운 금강호가 아침 7시15분 북쪽 강원도 장전항에 닻을 내렸다. 쪽창으로 내다보니 녹슨 군함이 시야에 들어온다. 나란히 정박한 관광선과 군함, 초현실적이다.
장전항은 유고급(70t) 잠수정 기지였다. 장전항을 쓰던 동해함대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로 100㎞ 북쪽으로 물러났다. 금강산은 한반도 동쪽 평화회랑으로 거듭났다.
“파도 사나운 바다를 헤치고 오신 여러분,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금강호를 휘감은 터질 듯한 긴장과 무거운 침묵을 깬 목소리의 주인공은 북쪽 박영철씨다. 금강호가 18일 오후 5시43분 동해항을 떠난 지 13시간32분 만이다. 육로론 2시간이면 족할 거리를 부러 12해리 공해 밖으로 멀리 돌아 디귿자로 14시간 가까이 항해한 건, 해안 군사시설을 관광객이 못 보게 해야 한다는 군부의 주장 탓이다.
금강호 출항을 텔레비전으로 본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사흘 뒤인 21일 서울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 “매우 신기하고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감탄했다. 그는 금강산 관광 사업을 포함한 김 대통령의 화해 협력 정책을 적극 지지했다.
첫 관광객의 압도적 다수는 실향민. 최고령 심재린(90), 함경남도 북청이 고향인 김병우(86) 할아버지 등은 “죽기 전에 (조금이라도 고향과 가까운) 북녘 땅을 꼭 한번 밟아보고 싶었다”고 했다. 자식들한테 유언을 남기고 금강호에 오른 이들이 적잖았다.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죽기 전에 꼭 가봐야겠다”며 말리는 자식들을 뿌리쳤단다.
‘포니정’ 정세영 전 현대자동차 회장도 첫 관광객으로 상팔담이 내려다보이는 바위에 걸터앉아 “형님 덕에 내가 금강산을 다 와보네”라며 환하게 웃었더랬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사태로 땅값이 곤두박질친 ‘떼돈 벌 기회’를 뒤로하고 금강산 관광 사업을 마지막 소명으로 삼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도, 김정일 위원장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금강산 첫 관광객을 취재할 때 30대이던 나도 50대 중반을 넘어선 ‘늙은 기자’가 됐다. 21년 전 금강산을 떠올리니 가슴 한켠이 시리고 아프다. 그때 취재기자의 본분을 잊고 만물상과 구룡연 관광로를 숱하게 오르내리며 업거나 부축해 모신 할아버지·할머니들도 대부분 이 세상에 없으리라.
유엔은 관광을 “평화로 가는 여권”이라 부른다. 관광이 낳을 사람 사이의 교류와 상호 이해가 굳게 닫힌 평화의 문을 열리라는 기대다. ‘13시간 바닷길’로 시작한 금강산도 ‘승용차 (개별) 관광’까지 진화했고, 2008년 7월12일 중단될 때까지 초등생부터 구순 노인까지 남녘 시민 193만4662명이 길을 다졌다. 금강산행의 명분이 관광이든 이산가족 상봉이든 사회문화 교류든 결국은 사람의 일이다. 사람들이 만나, 함께 밥을 먹고 울고 웃으며 내일을 여는.
1980년 5월 광주의 시민군이던 김담연(필명)은 <스무살 도망자>(전라도닷컴)에 이렇게 적었다. “사람 이야기가 빠진 전쟁기는 섬찟한 기록, 전쟁통계학, 증오심 조장 군사교범이다. 병사들과 사람들의 이야기로 전쟁터와 전쟁 밖의 간극이 메워질 때 평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지구 마지막 ‘냉전의 외딴섬’ 한반도를 옥죄는 미국의 패권 전략과 북한의 생존 전략의 충돌, 남과 북의 갈등·적대·화해·협력이 뒤엉킨 고난도 국제정치의 수렁에서 벗어나 평화·공존의 땅으로 나아가려 할 때 ‘사람’을 외면해선 결코 안 된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금보다 더 많은 인내와 용기와 지혜를 발휘하기 바란다. 남과 북 8천만 시민·인민의 평화로운 삶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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