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수 문화평론가
세상읽기
다른 얘기가 하고 싶었다. 좀더 화급한 현안으로 관심을 이동해야 마땅하다고 느꼈다. 지난달에 이미 이 지면에 줄기에 사로잡힌 영혼의 탄식을 늘어놓은 바도 있는데 이 무슨 소모성 질환이란 말인가. 하지만 소용이 없다. 개각과 유시민도, 사학법과 박근혜도, 시위농민 사망까지도 두피의 겉만을 스쳐지나갈 뿐 뇌리에 콱 박힌 줄기세포는 악머구리처럼 붙어 떠나가질 않는다. 배반포, 테라토마, 2번 줄기, 4번 줄기, 미즈메디, 성체줄기…, 오호라 100여년 전 프랑스 드레퓌스 사건의 열기가 이만 했을까.
요약하면 사기론과 음모론의 각축전이다. 전자가 속칭 ‘황까’를 낳고 후자가 ‘황빠’를 낳는다. 세상사의 진실은 언제나 나선형으로 중첩되어 있기 마련인데 이런 양자택일 앞에서는 곤혹스럽기 그지없다. 나름대로 양쪽을 오가보자.
먼저 ‘피디수첩’ 방영 이래 황우석 교수가 보여온 불투명한 처신. 보통 억울하게 누명을 덮어쓴 사람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황급히 공직을 사퇴하고 조사위의 1차 발표 앞에서는 급기야 교수직까지 내던졌다. 잠적과 입원과 거듭된 대책회의는 왜 필요했을까. 무언가 구린 게 있지 않을까. 일반인 황까는 이렇게 출발한다. 하지만 그 반대편, 황빠의 논거도 70%를 상회하는 지지율만큼이나 두텁다. 무엇보다 어설픈 논문 사기를 칠 동기가 보이질 않는다는 것. 조작을 하려 했다면 아예 각기 다른 체세포 사진 11개를 찍어 올리면 감쪽같았을 텐데, 어째서 석사과정생도 쉽사리 눈치챌 수 있는 부풀리기를 했단 말인가. 황빠는 황 교수가 음모의 희생자라고 굳게 믿는다.
중립 없이 한쪽 편에 서야만 한다면 어느 쪽이어야 할까. 내가 개인적으로 연대감을 느껴온 언론들은 한결같이 ‘까’의 중심에 있었다. 근자에 이른바 명문대의 점잖은 교수들, 흔히 주류라고 표현되는 사람들과의 저녁자리가 몇 차례 있었는데 그들도 대부분 ‘까’에 가까웠다. 눈치가 있는 건데, 진보와 학계 주류들의 입장에 서있는 게 속 편히 사는 길 아니겠는가.
그러나 두 개의 마음 즉, 양심의 한쪽 편이 그냥 놔두질 않는다. 사실 설득력 있는 음모론 버전은 황 교수 개인에 대한 우상숭배와는 거리가 멀다. 음모론은 황 교수 하나를 제거함으로써 다같이 행복해지는 여러 이익집단에 대한 의혹에서 출발한다. 또한 유언비어, 곧 음모론이 유포되는 현상은 공식 언로가 불신받을 때 나타나는 현상인데, 현재 유일한 공식기관인 서울대 조사위의 발표내용과 발표시점이 영 석연치 않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검찰수사에 대한 열광적 기대 여론이 그래서 생겨난다.
나는 이 사태가 황 교수에게 최고 과학자 운운의 과도한 영예를 얹어준 데서 비롯됐다고 본다. 그의 연구는 마치 삼성전자의 반도체 개발처럼 세계 경쟁이 붙은 첨단분야의 기술개발 차원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야 그 모든 비학문적, 비학자적 행태들이 설명될 수 있다. 명칭부터 생명과학이 아닌 생명공학 즉 테크놀로지가 아닌가. 하지만 비판자들은 그에게 순수학문 및 이론과학의 엄정성, 실험논문의 가능성 검증이기보다는 교과서 검증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돈 되는 기술개발 경쟁과정에서 불거진 이해다툼으로 사안을 바라보면 누가 사기 친 것도 음모를 꾸민 것도 아닐 수 있다는 전망이 생겨난다. 나는 여기에 주사위를 던지고 싶다.
김갑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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