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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삐라, 남북의 심리전 / 신승근

등록 2020-06-21 13:34수정 2020-06-22 12:22

‘삐라’의 정식 명칭은 ‘심리전 전단지’다. 일제 강점기 때인 1930년 중국 최고 군사 양성소인 황포군관학교 출신 ‘의열단’ 단원들이 주축이 된 ‘조선의용대’가 방패연을 이용해 일본군의 탈영과 투항을 종용하는 삐라를 뿌렸을 정도로 그 역사는 길다. 계산서나 전단지 등을 뜻하는 영어 ‘빌’(bill)과 일본어 ‘비라’(びら) 에서 그 명칭이 유래했다고도 한다. 광복 뒤 극심한 좌우 이념 대립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삐라는 남과 북 당국이 상대를 겨냥한 중요한 심리전 수단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남쪽에선 한국전쟁 이전엔 ‘여순 반란’, ‘제주 4·3 항쟁’ 등으로 산으로 들어간 빨치산의 전향을 촉구하는 데 주로 활용했다. 한국전에선 남북이 ‘삐라 전쟁’을 벌였다. 유엔군은 승전 소식과 함께 ‘안전보장증’을 날려 보내 인민군에게 자유로운 남쪽으로 오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중공군이 참전하자 조상이 지켜낸 나라를 오랑캐(중공군)에게 내주고, 전장에서 죽어가는 인민군과 달리 중공군은 후방에서 놀고먹으며 아내와 누이를 능욕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한국전쟁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25억장, 북한 인민군은 3억장의 삐라를 뿌린 것으로 추산한다.

북한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른바 ‘최고 존엄’을 겨냥한 삐라도 시대에 따라 변천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50년대엔 김일성 주석이 소련과 중국에 나라를 팔아먹는다는 논리를 주로 담았다. ‘매국노 김일성은 백두산 절반을 중공에 팔아먹고 또 원산항을 쏘련에 팔아먹으려 하고 있다.’ ‘오랑캐 앞잡이, 노서아의 노예시민권 탄 이 민족 반역자 타도하라’는 등의 삐라가 살포됐다. 김일성을 스탈린 서기장, 모택동 주석의 노예로 묘사한 삽화를 담은 삐라도 많았다.

대북 심리전단지. 강원도 디엠제트(DMZ) 박물관
대북 심리전단지. 강원도 디엠제트(DMZ) 박물관
권력세습이 본격화한 70년대부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문란한 사생활과 세습에 대한 비난이 핵심 내용으로 자리 잡았다. 당 간부들의 반란을 종용하고, ‘망나니 김정일’ ‘매일 대한민국 방송 듣고 텔레비죤 시청, 미국 등 서방세계 영화 필름 2만개 갖고 있는 영화광’ ‘부화방탕 김정일, 본처 4명에 첩이 2천명’ 등의 글귀가 새겨졌다. ‘구국 청년 동지회’ 등의 이름으로 ‘위기 김정일로는 안된다. 식량 배급 못 주는 주제에 제 생일잔치 예산 낭비’ 등 내부 저항단체의 행위로 가장한 삐라도 살포했다. ‘3대째 권력세습 획책. 애비 아들에 이어 다음은 손자놈 차례?’ 등 3대 세습을 예견하고 조롱하는 삐라도 많았다.

또 1970대엔 ‘배불리 먹고 싶지 않습니까?’라며 월남한 인민군 가족이 고봉밥에 고깃국을 먹는 모습, 서울 등 도시, 조선업 등 중화학공업 발전상을 담았다. 1980년대엔 86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 개최를 알리며 ‘무료초대권’ 형식의 삐라로 인민군의 귀순을 부추겼다. 이 시기에 반라의 수영복을 입은 여성 사진에 ‘당신을 기다리겠어요’ ‘서울에서 만나요’ ‘자유가 있는 곳에 젊음을’ ‘우리 함께 살아요. ’등의 문구를 적은 삐라를 집중적으로 살포했다. 86년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수영복 심사 장면과 함께 ‘의거 월람하여 이런 멋진 미인을 만나 련애(연애) 한번 해보세요!’라는 문구가 담긴 삐라는 그 시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안소영, 정윤희, 이경진, 이미숙, 이혜숙, 최명길, 황신혜, 원미경 등 당시 유명 여배우들은 삐라에 단골로 등장했다. 1990년대엔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정상회담, 한-소 국교정상화, 소련의 몰락 등 사회주의 정권의 퇴조를 알리는 데 주력했다.

대북 심리전단지. 강원도 디엠제트(DMZ) 박물관
대북 심리전단지. 강원도 디엠제트(DMZ) 박물관
북한도 남쪽으로 많은 양의 삐라를 날려 보냈다. 대부분 김일성, 김정일 찬양 등 우상화 내용이었다. 60~70년대엔 ‘행복의 땅 이북 농촌’ 등을 소개하며 군인의 귀순을 종용했고, 80년대엔 남쪽 여배우 사진을 활용해 북한 체제를 선전했다. 전두환 정권 땐 그를 광주 시민을 죽이고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구두 바닥을 빠는 개로 그리거나 광주 학살 장면을 삐라에 새겼다. ‘양키는 아메리카로’ 등 반미 선동도 많았다. 김영삼 정부를 겨냥해선 ‘문민 정권도 5,6공과 같은 호전광’ 등의 삐라를 날렸고, 북한의 수소탄 개발 등 핵 무력을 과시하는 내용도 자주 등장했다.

2000년 6·15 정상회담으로 남북 화해 무드가 조성되고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상호비방 중단’에 합의하면서 남북 당국이 주도하던 삐라 살포는 공식 중단했다. 북한 삐라가 줄면서 경찰서 등에 신고하면 연필, 공책 등 학용품을 주던 ‘북한 불온선전물 수거처리 규칙’도 2007년에 결국 폐지했다.

대남 심리전단지. 강원도 디엠제트(DMZ)박물관
대남 심리전단지. 강원도 디엠제트(DMZ)박물관
그러나 남쪽에선 탈북자 단체, 북한 인권운동 단체 등이 북한 정권을 비판하는 내용의 전단을 살포하는 새 주역으로 등장했다. 이들은 아이티 기술을 활용해 북한 실상을 고발하고 김정일, 김정은 부자를 비하하는 사진, 영상 등이 담긴 이동식 기억장치(USB)나 1달러짜리 지폐를 전단지와 함께 살포했다.

특히 박근혜 정부가 탈북자 단체의 대북 삐라 살포를 사실상 부추기자 북한은 강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며 물리적 대응을 경고하고, 2014년엔 삐라를 향해 발포하기도 했다. 북한은 또 박근혜 당시 대통령을 ‘전쟁광신자’ ‘파쑈마녀’ ‘악녀’ ‘미국과 일본에 붙어먹는 ⅹ녀’ 등으로 원색 비난하는 삐라로 맞대응했다. ‘박근혜 탄핵’ 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시절에는 ‘황교안은 박근혜 꼭두각시, 충견이다’라며 사드 배치를 결정한 황 대행을 ‘사대 매국노’로 비난하기도 했다.

신승근 논설위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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