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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문재인 정부의 대북 확성기 / 김종대

등록 2020-07-09 17:04수정 2020-07-10 02:40

2018년 5월1일(화) 오후 군 장병들이 4·27 판문점 선언의 후속 조처로 경기도 파주시 군사분계선 교하 소초에 설치된 대북 고정형 확성기를 철거하고 있다. 북한군도 이날부터 대남 확성기를 철거하는 동향이 포착됐다. 파주/사진공동취재단
2018년 5월1일(화) 오후 군 장병들이 4·27 판문점 선언의 후속 조처로 경기도 파주시 군사분계선 교하 소초에 설치된 대북 고정형 확성기를 철거하고 있다. 북한군도 이날부터 대남 확성기를 철거하는 동향이 포착됐다. 파주/사진공동취재단

북한의 4차 핵실험에 대응한 우리 정부의 대북 제재조치로 전방에서 확성기 방송이 시작된 2016년 1월.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확성기 방송을 듣고 전방에서 많은 탈북 귀순자가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를 표명하면서 이를 “진실의 힘”이라고 했다. 신년사 발표 후 열흘 뒤인 1월22일 청와대에서 열린 안보부처 업무보고 자리에 참석한 탈북 군인이 “확성기 방송을 듣고 탈북을 결심했다”고 발언하자 박 대통령의 얼굴에는 반가운 미소가 번졌다. ‘우리가 북한의 급소를 제대로 찔렀다’는 확신의 표정이었다. 국방부는 160억원을 투입하여 고성능 확성기를 전방에 설치하고 하루에 10시간 넘게 방송을 했다. 이 정도면 전방에서 귀순자가 넘쳐나야 하는데, 도대체 넘어오는 자가 없었다. 어떤 조바심 때문이었는지 그해 총선을 1주일 앞두고 국가정보원은 중국에서 북한이 운영하는 류경식당에서 영문을 모르던 12명의 종업원과 지배인을 단체로 싣고 와 언론에 공개해버렸다. 전방에서 탈북자가 나타나지 않고 시간만 허비하자 10월 국군의 날에 대통령은 “북한 주민과 군인은 자유의 터전으로 넘어오라”며 공개적으로 탈북을 촉구했다. 확성기 방송도 북한 정권에 대한 공세를 날로 높여갔다.

2017년 5월에 출범한 문재인 정부에는 전방의 확성기가 골칫덩어리였다. 없애자니 보수언론이 ‘북한 눈치 본다’며 반발할 것이 뻔하고, 놔두자니 전방에 분란만 일으킬 이 물건을 어찌할 것인가. 아주 창의적인 대안이 나왔다. 기존의 확성기 방송은 북한의 체제의 열등함을 지적하고 지도부의 존엄을 공격하거나 주민과 군인의 탈북을 권유하는 내용이 주종이었다. 문재인 정부는 정치적 내용을 다 빼버리고 아이돌 공연과 날씨와 건강과 같은 생활 정보, 그리고 라디오 연속극으로 편성을 몽땅 바꿔버렸다. 박근혜 정부가 만든 대북 심리전 도구에 문재인 정부는 존중과 배려, 유용성과 즐거움을 실어 보냈다. 이때부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전방에서 탈북 주민과 군인이 갑자기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해 6월에만 북한군 귀순이 중부전선에서 두차례 있었고, 8월에 서해 교동도에서 주민이 귀순했다. 이후로도 매달 전방 귀순이 이어져 11월 초에는 11명에 달했다. 그 이전의 2년간 전방 탈북자를 추월하는 숫자다. 한 북한 병사는 합동신문 과정에서 “연속극을 진행하던 여성 동무를 만나고 싶다”며 팬심을 드러냈다. 병사의 소원대로 당시 연속극을 낭독하던 국군정보사령부 여군 상사가 이후에 병사를 만났는지, 필자는 그게 몹시 궁금하다.

그토록 탈북을 촉구할 때는 요지부동이다가 탈북하지 말고 방송이나 즐기시라고 할 때는 마구 넘어오는 북한 병사는 대다수가 90년대 이후 출생한 신세대다. 새로운 유행에 민감하고 물질적 풍요와 행복을 갈구하는 성향의 새로운 북한의 세대에 박근혜식 심리전은 먹혀들지 않았다. 북한의 체제를 붕괴시키겠다고 으르렁거리던 국군정보사령부가 어느 날 친절한 안내자로 얼굴을 바꾸자 정작 북한 체제에 미세 균열이 발생하는 역설이 엄연한 한반도의 현실이다. 문재인 정부는 북한에 너무 친절하게 배려하고 존중해왔다. 북한 정권으로서는 이런 문재인이 과거 냉전의 전사처럼 으르렁거리던 박근혜보다 훨씬 더 불편하고, 더 나아가 위협적인 존재일지도 모른다. 자기들 체제를 위협하는 것은 냉전식 봉쇄정책이 아니라 적응이 어려운 친절한 안내자들이기 때문이다. 북한 정권의 입장을 고려해서 2018년 4·27 판문점 합의에 따라 대북 확성기 방송을 중단했다. 그 직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전방에서 북한군 병사의 탈북 행렬이 멈췄다.

주초에 미국의 스티븐 비건 국무부 부장관이 서울에 왔다. 다시 북미 대화가 재개되지 않겠느냐는 조심스러운 전망이 나오자 북한은 최선희 제1부상과 권정근 미국국장이 사흘 간격으로 “미국과 마주하는 일은 없다”는 성명을 내보냈다. 반복적으로 상대방에게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건 실제로는 “관심이 있다”는 뜻이다. 정말로 관심이 없다면 비건이 서울에 오건 말건 신경 끄면 될 일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고 반어법 공세를 지속하는 북한식 확성기의 문법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더욱더 친절하고 세심하게 북한에 안내자 역할을 계속해야 한다. 이것이 문재인식 대북 확성기의 아주 뛰어난 효능이다. 북한이 반응하기 때문이다.

김종대 | 정의당 한반도평화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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