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과 차별이 만연한 세상에 단 하나 공평한 게 있다면 모두가 나이들어가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림은 <노화의 종말> 표지 이미지. 부키 출판사 제공
“무슨 부모 자식 동거 총량의 법칙이라도 있는 건가.”
스무살 이후 명절에만 보던 엄마와 최근 ‘동거’를 시작한 친구가 말했다. 한 지붕 정도가 아니라 한 이불을 덮게 됐다. 유독 잔정 없는 모녀관계가 이렇게 극적 반전을 맞게 될 줄 친구는 미처 몰랐다.
한달 전쯤 혼자 살던 친구 엄마는 아침에 일어난 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여긴 어디지? 내가 왜 여깄지? 자문하던 엄마는 한참 만에 휴대폰을 발견해 최근 통화를 눌러 친구에게 연락이 닿았다. 친구는 엄마에게 치매가 온 줄 알고 ‘엄마 인생은 끝난 건가’ 외치기 전에 ‘내 인생은 끝난 건가’ 절규하며 병원에 모시고 가서 온갖 검사를 했다. 다행히 치매는 아니었고 병원에서는 그냥 그럴 수 있다고 했다. 늙으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는 듯이. 반전은 여기서부터다. 두번의 암수술도, 보청기 맞춤도 자식들에게 알리지 않고 해낼 정도로 극강의 독립심을 자랑하던 친구 엄마는 그날 이후 친구의 침대 옆자리를 차지했다. 아직 엄마의 옷자락을 만져야 잠이 드는 십대 손주까지 강제 독립시키고서 말이다.
“10년쯤 뒤에나 찾아올 줄 알았던” 엄마의 급격한 노화는 친구를 당황시키기는 했지만 친구는 의외로 무던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유를 물었다. 그는 그냥 닥치니까 지내는 거지라며 한마디 덧붙였다. “어릴 때는 진짜 엄마처럼 살지 말아야지 했는데, 늙은 엄마를 보니 나도 별수 없이 저렇게 늙어가겠구나 싶기도 하고.” 성장의 방식은 각자 다르지만 노화의 방향은 하나이기 때문일까. 평생을 살갑지 않았던 칠십대 엄마와 사십대 딸은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서 예기치 않게 훈훈한 가족드라마의 주인공이 됐다.
사실 늙고 기운 잃은 엄마에게서 나의 미래를 보지 않아도 우리는 늙어간다. 불평등과 차별이 만연한 세상에 단 하나 공평한 게 있다면 모두가 나이들어가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노화’는 “꽃 피고 열매 열리면 낙엽 지는 거지”라고 쉽게, 편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우리가 체감하는 노화는 쌓이는 시간의 점진적 변화가 아니라 방심한 사이 어느 순간 이뤄지는 종의 전환에 가깝다.
얼마 전 친한 선배가 휴대폰을 바꿔야 한다길래 카메라와 동영상 활용이 좋아졌다는 주변의 정보를 주워섬기며 아이폰11을 추천했다. 며칠 뒤 다시 만난 선배가 나에게 보여준 건 보급형 아이폰이었다. 선배의 업무 특성과 자산 규모와 체면에 걸맞지 않은 궁상맞은 선택을 왜 한 거냐고 핀잔을 했다. “난 최신 사양을 보여달라고 말했지. 두번이나 말했다구.” 어쩐지 그에게서 한 말 또 하는 늙은 엄마의 후광이 보였다. 그러나 곧이어 나는 엄마가 두번 세번 말하는 이유를 알게 됐다. “처음에는 비싼 거 쓸 필요 없다고 하더라.” 그는 굴하지 않고 한번 더 보여달라고 했다. “이번에는 복잡한 기능 어렵다고 이 정도면 충분히 쓰실 거라는 거야” 그랬다. 그 자리에서 아이폰 카메라 기능에 대한 강의를 할 수도 있었던 그는 보급형 모델과 액정 보호 필름, 촌스럽고 투박한 보호케이스 같은 사은품 나부랭이를 한아름 받아들고 가게 문을 나서야 했다. 필시 이십대일 점원은 노인네에게 정직한 장사를 했다고 자신의 인격에 막 감동했겠지.
“바보 같은 녀석, 돈 벌 기회를 걷어찼네.” 선배와 맹비난을 주고받던 참에 옆에 있던 후배가 “아이폰11 여기요. 저도 이번에 바꿨어요”라고 얄밉게 말하며 보여줬다. 쉰 언저리의 우리는 어느새 삼십대인 후배와는 다른 종으로 분화된 것이다. 최신 기종의 값비싼 휴대폰을 사기 위해서는 잘 차려입고, 노트북컴퓨터 가방과 명함, 어쩌면 집문서까지 들고 가야 판매원이 귀기울여주는 그런 종으로의 전환 말이다. 한 십년 더 지나면 두 주인공이 코앞에서 아무리 불러도 못 듣던 점원이 멀리 젊은 여성의 목소리에는 전광석화처럼 달려가던 <그레이스와 프랭키>(두 노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미국 드라마)처럼 투명인간 종으로 바뀌려나.
여성학 연구자 정희진은 나이듦이 실체적 현상이라기보다 “타인의 시선을 내재화한 자기감정”이라고 썼다. 외모, 건강 등 물리적 조건뿐 아니라 사회경제적 환경 안에서 우리는 나이들기 때문이다. ‘언제나 마음은 청춘’이라고 매일 아침 복식호흡으로 외쳐도 “나이는 자기 마음대로 들지 않는다”. 쇠약해진 부모 부양의 무게를 짊어지며 중년의 한복판에 진입했음을 확인하기도 하고, 최신 기종 전자기기 획득에 실패함으로써 사회적 노년기를 강요받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다는 걸 아이폰 자랑하던 후배에게 알려주고 싶다. “너도 늙는다.”
김은형 논설위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