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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공활을 기억하는 퀴어 할머니 / 정영목

등록 2020-08-07 16:05수정 2020-08-08 02:33

정영목 ㅣ 번역가·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때는 대학 때 공활을 한 세대가 이제 할머니 소리를 듣게 된 가까운 미래. 장소는 낡은 수도 계량기가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곤 하는 낡은 복도식 아파트. 주인공은 이 아파트의 독거노인 데런. 데런이 처음부터 독거한 것은 아니고, 물론 처음부터 노인이었던 것도 아니다. 까마득히 젊었던 시절 연인으로 만난 대학 동기 디엔과 이후 삶을 함께했고, 이 아파트에서 함께 오래 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떠났고, 데런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상실을 애도하고 있다. 그녀가 비몽사몽 중에 보낸 하룻밤을 옮겨다 놓은 단편이 권여선의 <희박한 마음>이다.

데런은 오래전 디엔과 마지막 시내 나들이를 했을 때 그녀가 해준 꿈 이야기에 사로잡혀 있다. 디엔은 꿈에서 선배와 동기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공장 활동과 관련하여 부도덕한 이력이 있다며 그녀를 추궁한다. 디엔은 공활을 하려는 동기 데런에게 주민등록증을 빌려주었을 뿐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답하며, 데런은 이미 죽은 지 오래라고 덧붙인다. 그러자 한 선배가 죽은 데런에 관해 증언하라고 요구하고, 디엔은 증언을 하기 전에 잠에서 깬다. 데런은 디엔의 꿈에서 왜 자신이 죽은 것으로 나오는지, 죽은 자신에 대한 디엔의 증언은 어떤 내용이 되었을지 몹시 궁금하다.

데런은 이날 밤 엉킨 기억의 실타래를 풀어나가다 첫번째 문제의 답을 스스로 얻어내는데, 그 과정에서 아래층 젊은 남자가 본의 아니게 도움을 준다. 새벽에 위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난다며 그가 다짜고짜 데런의 집으로 찾아와 벨을 누르고 문틈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격한 어조로 다그치고, 이 난입 시도가 데런에게서 수십년 전 또 다른 폭력적 난입의 기억을 끌어낸 것이다. 대학 시절 데런이 디엔과 교정에서 함께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복학생 느낌의 남자가 다가와 담배를 끄라고 명령하고, 디엔이 못 끄겠다고 답하자 따귀를 때린다. 데런은 무력하게 항의 한번 못 하는데, 할머니 데런은 분노와 좌절과 공포가 그녀와 디엔의 삶을 돌이킬 수 없이 응결시켰다고, 자신이 죽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고 단언한다.

이때 꺼지지 않은 잉걸은 평생 데런의 내부에 남아 시시때때로 폭발을 일으키게 된다. 평소에는 겁우기(겁쟁이) 상태지만, 그 이면에 웅크리고 있던 것이 터져 나오면 내부의 심연이 균열하게 되고, 드라이아이스처럼 하얗게 타버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게 되는데, 물론 이것은 죽음의 재현이다. 평생에 걸쳐 꺼지지 않은 잉걸이 확 타오를 때마다 데런은 불살라져 온 것이다. 수십년 전에 담배 끄라고 다그치며 따귀를 때린 것 때문에? 라고 묻는 것은, 56년 전 일로 이제 와서 미투를? 이라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로, 질문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드러낼 뿐이다.

데런이 이 죽음을 분신으로 바라보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 할머니가 공활을 기억한다면, 비록 언급되지는 않지만, 그 시대의 또 다른 분신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선배들의 부도덕성 추궁, 담배를 끄라는 명령이라는 폭력적 난입에도 그 시대의 더 큰 폭력적 난입이 암묵적 배경으로 깔려 있다. 그러나 데런은 자신의 죽음을 담보로 자신의 분신과 다른 분신을 같은 자리에 놓고, 큰 폭력과 작은 폭력이라는 관념을 물리친다. 그런 식으로 큰 것이 작은 것을 삼키는 것 또한 폭력적 난입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그런 구분을 걷어내는 순간, 가려진 채 되풀이되고 있었던 데런의 분신, 즉 선배와 동기와 이웃으로 이루어진 일상 속의 난입과 죽음이 드러나게 된다. 이제 데런은 죽은 자신에 관해, 또 디엔에 관해 무슨 증언을 해야 할까? 그것이 데런이 알아내야 할 남은 숙제다. (소설 속 인용이 많아 부호를 생략했다고 필자가 알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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