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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나의 늙음은 내가 제일 늦게 알아본다

등록 2020-08-26 18:07수정 2020-08-27 02:38

영화 <69세>의 여주인공 효정(예수정). 엣나인필름 제공
영화 <69세>의 여주인공 효정(예수정). 엣나인필름 제공

김은형 ㅣ 논설위원 

지난번 첫회 칼럼이 나간 다음 한 지인이 댓글 하나를 캡처해서 보내줬다. “위원님은 아직 젊어 보이십니다.” 칭찬을 가장한 폭로전인가. 1회에 들킬 줄이야. 음… 저 프로필은 11년 전 아직 30대 때 사진이다.

나이듦에 관한 칼럼을 쓰면서 10년이나 젊을 적 사진을 쓰는 게 반칙 같아 찜찜했다. 때마침 결혼식 이후 처음 속눈썹까지 붙이는 풀메이크업을 할 일이 생겨 친한 사진기자에게 프로필 사진을 부탁했다. 햇살 좋은 옥상에서 한참을 찍은 뒤 “왼쪽 얼굴이 훨씬 예쁘네”라고 동료가 웃으며 보여준 사진을 보고, 절교를 선언할 뻔했다. 예쁜 왼쪽 얼굴―그것도 전문가의 손길로 치장한―이 이 지경이면 평소 나의 얼굴 전면은 어떻게 감당한 건지 묻고 싶었다. 동시에 왜 캐논과 니콘이 수천만원짜리 하이엔드 디지털카메라를 개발하고도 각종 싸구려 보정 앱으로 무장한 휴대전화 카메라에 자신의 자리를 빼앗겼는지 섬광 같은 이해가 왔다.

변하는 외모는 우리의 노화 과정을 생중계한다. 매일 보는 욕실 거울이야 대충 외면한다 쳐도 가끔씩 피할 도리 없이 찍히는 사진 속 나에게는 질리지도 않고 늘 충격받는다. 왜 자연스러운 생의 과정인 노화를 부정하냐고? 현자인 양 잘난 척하며 이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그저 단순한 멍청이”라고 답해도 된다. 노화를 받아들이는 건 그렇게 단순한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놓고 떠들진 않지만, 노년층 대부분은 몸뚱이 안의 내가 젊은 시절 그대로라고 느낀다. 나는 그대로인데 몸뚱이만 변해가는 것이다. 이것은 엄청나게 혼란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작가 도리스 레싱은 이렇게 썼다. 우리가 쇠락해가는 외모에 낙심하는 건 단순히 외모지상주의에 포획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여전히 중2병을 갓 졸업한 까칠함이 살아 있고 흥청망청 난장판을 만들며 밤을 새우고 싶은 20대의 열정이 끓어오르건만 거울 속에서 나를 쳐다보는 건 밤 10시면 기숙사 문을 걸어 잠그는 25년차 사감 선생님이다. 실제로 밤 10시가 되면 시끄러운 술집에서도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게 된 체력은 또 어떻고. 이처럼 지난한 혼란 속에서 노화에 대한 자각은 늘 연착하는 비둘기호 기차처럼 노화의 속도보다 뒤처진다.

그래서 나의 노화는 나 자신보다 외부가 더 빨리 인지하게 된다. <지혜롭게 나이 든다는 것>에서 솔 레브모어가 쓴 것처럼 “이상적인 세상이라면 주름살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 지혜와 유머와 사교성의 증거로 받아들여”지겠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지 못하다는 게 함정. ‘노년’과 ‘성폭행’이라는 양 갈래의 무거운 소재를 다루는 영화 <69세>에서 내내 나를 사로잡은 건 주인공의 멋진 옷차림이었다. 흔히 몸과 형편이 고단한 노년의 간병인에게서 연상되는 모습이 아닌, 예술이론 교수처럼 세련되고 품위 있는 옷차림의 연출 의도가 궁금했다. 마침 후반부에 주인공이 이에 대해 직접 답한다. 후줄근하게 입고 다니면 할아버지들이 만만하게 보고 집적대기 때문이라고. 내세울 것 없는 노년의 여성에게 옷차림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생존 방식, 노화가 드러내는 사회적 약자성에 대한 처절한 방어였던 셈이다.

영화 &lt;69세&gt;의 여주인공 효정(예수정). 엣나인필름 제공
영화 <69세>의 여주인공 효정(예수정). 엣나인필름 제공

아름다움, 특히 여성의 아름다움은 젊음과 등치된다. <보그> 같은 여성 패션지의 표지 얼굴을 분석한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표지 모델의 얼굴은 보통 성인여성보다 큰 눈과 작은 코, 도톰한 입술 등 어린아이에 가까운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한국 여배우들이 잠시 쉬면 볼이 통통해져 돌아오는 것도 같은 이치다. 하지만 거스를 수 없는 노령화의 기세는 때로 이 공고한 신화에 도전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몇년 전 미국과 유럽의 브랜드들이 끌어들인 중장년 모델 붐이 한 예다. 헬렌 미렌, 제시카 랭 같은 60~70대 여배우들도 화장품 모델로 등장했는데 가장 파격적이었던 건 미국 작가 조앤 디디언이 셀린느의 뮤즈로 발탁된 것이다. 80살의 나이를 조금도 숨기지 않는 얼굴과 목주름, 힘줄이 울퉁불퉁 튀어나온 앙상한 손을 고스란히 드러낸 그의 사진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물론 이 사진 한장이 이제 우리는 노화와의 전쟁을 마치고 목주름을 전격 수용하겠다는 명품 브랜드의 순진한 선언일 리는 없다. 차라리 디디언이라는 지식인 여성 아이콘을 통해 지적 허영의 후광까지 둘러주겠다는 야심에 가까울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런 시도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다고 본다. 적어도 늙은 몸에 대한 혐오를 당연시하는 완고한 분위기에 예외 사례를 하나 더 추가했으니 말이다.

사진기자 동료가 포토샵으로 다크서클까지 지워서 선물한 사진으로 프로필을 바꿀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10년 뒤에 다시 고민해보고자 한다.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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