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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욕망의 리스트 / 김영준

등록 2020-08-28 15:48수정 2020-08-29 14:18

김영준 ㅣ 열린책들 편집이사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에는 ‘라디오의 박사 게임’에 나갈 것에 대비해서 나름의 재치 있는 답을 준비해놓고 있는 인물이 나온다. 그러나 그가 마이크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과연 준비한 답을 말할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다. 두가지 문제가 있는데, 하나는 기억이 유지되느냐이고 다른 하나는 그 생각이 자기도 혼란에 빠지지 않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말이 되는가이다. 이것은 말로 해보거나 종이에 써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미국 케네디 행정부의 국방장관 맥나마라는 포드사 사장 시절 이렇게 말하곤 했다. “생각을 종이에 적어라. 아직 종이에 쓰지 않았다면 너는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다.” 명쾌하지만, 이건 종이에 적기 전의 생각이 전혀 그럴듯한 꼴이 아니라는 뜻일 뿐, 아예 없다는 판정이 아니다. 그 생각―부족하고 막연한 의식의 덩어리―도 존재는 한다. 단지 그 덩어리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려면 종이에 써보는 수고를 할 수밖에 없다.

사업가 워런 버핏의 인생목표 정리법이 꾸준히 얘깃거리가 되고 있다. 먼저 자신의 인생의 목표 25가지를 적는다. 다 쓰고 나면 그중 가장 중요한 다섯가지를 고른다. 이것이 ‘목표’이다. 나머지 20개를 따로 옮겨 적는다. 그리고 제목을 이렇게 쓴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지 말아야 할 20가지’. 즉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턱없이 짧다는 것이다. 생각했던 것의 5분의 1밖에 안 된다. 실제로 이걸 해보면 약간 혼란스러운 느낌도 든다. ‘버려야 할 것’ 목록 속에 ‘해야 할 것’의 전제조건으로 보이는 것들도 들어 있기 때문이다. 버린다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가치가 커 보이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어디다 제출하는 것도 아니니 수정하면 된다. 버핏 리스트의 좋은 점은 가짓수가 많은 데 있는 듯하다. 25개를 적다 보면 예상 못 한 게 나온다.

연초에 ‘읽고 싶은 책 열권’의 제목을 종이에 써본 적이 있었다. 점점 책을 안 읽게 된다고 느끼던 와중에, 여러 권을 동시에 병행해서 읽으면 독서 시간을 늘리는 데 효과가 좋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던 것이다. 하루에 각권 5분씩이라도 할애한다는 마음이면 열권 스무권도 같이 읽어 나갈 수 있다고 한다. 아무튼 목표가 좋아 보여 리스트를 적었다. 처음 두세권은 떠올리는 데 몇초도 걸리지 않았지만 그다음부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쓰다 보니 8, 9번부터는 의외의 책들이 나타났다. 의외라는 것은, 열권이나 적지 않았다면 좀처럼 떠오를 것 같지 않은 책이라는 뜻이다.

살면서 우리는 자신밖에 생각 안 하는 것 같지만 정작 자신에 대해 명료한 생각―맥나마라식의 생각―을 할 필요를 느끼는 경우는 드물다. 아마 누구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발견을 위해 내가 원하는 것들을 종이에 써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보통 때는 잘 안 떠오르는, 예컨대 수줍은 나머지 여러 항목 속에 섞여서가 아니면 결코 혼자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욕망도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알아보고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정신건강에도 유익할 것이라 생각된다. 위의 리스트들은 그런 것이다.

나는 바르트의 다음과 같은 말이 늘 재밌었다. “상실 뒤에 이대론 안 되겠다고 느끼고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떠올린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욕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즉 욕망은 매우 수줍지만 교활하기도 하다. 스파이나 마피아 두목처럼 감시가 소홀한 틈을 정확히 이용할 줄 안다. 리스트를 적다 보면 그런 욕망도 튀어나와 우리를 놀라게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놀라움도, 리스트가 불가피하게 상기시키는 것, 즉 삶이 유한하다는 두려움보다 크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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