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목 ㅣ 번역가·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1996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파고>에서도 중간이 지나서야 출연한다며 평소 자신의 조연적 역할을 두고 농담을 하던 프랜시스 맥도먼드는 오십 대 중반인 2011년 <굿 피플>로 토니상을 받고 2014년 텔레비전 4부작 미니시리즈 <올리브 키터리지>로 에미상을 받아 이른바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 2017년 <쓰리 빌보드>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또 받은 것은 덤이다. 그녀는 나이가 들면서 오히려 작품을 이끄는 역할을 맡게 되어, <올리브 키터리지>에서는 타이틀 롤은 물론 제작까지 책임졌다. 이 드라마는 퓰리처상을 받은 동명 연작 단편집(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권상미)이 원작으로, 맥도먼드는 각색 작가(2년간 매달려 올리브를 중심으로 윤곽을 또렷하게 살려놓았다)와 감독을 불러와 그것을 자신의 작품으로 옮겨놓았다.
이 작품은 “평범한 삶 같은 건 없다”는 표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평범한 이야기다. 미국 뉴잉글랜드 해안가 마을에서 중학교 수학 선생인 올리브와 약국을 운영하는 헨리 키터리지 부부가 외아들을 키우고 출가시키고 사별하는 이십오 년간의 인생 여정이 중심이며, 그 정도 기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생길 법한 다사다난이 드라마를 채우고 있다. 얼핏 아름다운 시골 마을의 훈훈한 이야기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좀처럼 곁을 주지 않는 이 드라마는 우리의 평범한 기대를 계속 배반하는 작은 반전의 연속인데, 그 반발력의 진원은 비호감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 올리브 키터리지다.
괴팍한 올리브는 추운 겨울밤 문을 닫지 못하게 문간에 버티고 서 있는 사람과 비슷하다. 그녀는 밖에서 죽음에 한 발을 딛고 사는 이들에게는 강한 유대를 느끼지만, 안에서 불을 쬐며 텔레비전을 들여다보는 사람들, 얄팍한 벽으로 보호받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경멸한다. 우리의 평범한 삶의 바탕인 일상적 안정, 그 안정의 핵인 생존, 제정신, 예의, 주류, 호감의 경계선에 서서 죽음, 광기, 무례, 비주류, 비호감의 화신으로서 그런 안정은 환상이라고 찬바람으로 일깨운다. 어쨌거나 그 일상의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라고 여기는 우리에게 이런 올리브는 우리 자신의 위태로운 면을 거울처럼 비추는 위험한, 그래서 혐오스러운, 그러면서도 매혹적인 존재이며, 우리의 그런 양가적인 느낌을 맥도먼드가 선택한 배우 리처드 젱킨스는 헨리 키터리지로서 체현해낸다. 이 드라마의 장점은 평범의 그런 이면을 좀비처럼 너무 거리가 먼 존재로 등장시켜 비교적 안전하게 관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선생님으로서, 일상 속의 메멘토 모리로서 구현해내고, 그래서 우리를 더 거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작품의 또 한 가지 혐오스러운 매력은 경계를 끝까지 유지함으로써 경계를 없앨 계기를 만드는 데 있다. 우리는 실제 삶에서도 그렇듯이 드라마에서도 경계에 선 자를 잘 용납하지 못한다. 그가 경계 밖으로 나가거나 아니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갈등의 해소라고 본다. 그러나 올리브는 경계 안으로 투항하지 않는다.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니 우리가 바라는 어머니나 할머니의 모습을 보여줄 법도 하지만, 올리브에게 그런 굴복은 없다. 그렇다고 경계 밖으로 투항하여, 자기 아버지처럼 스스로 죽음에 안기지도 않는다. 그냥 그 자리를 유지함으로써 그것이 진짜 경계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품게 만든다. 그 너머도 실은 모두의 평범한 삶에 내재한 공간이고, 그 공간을 복원하고 통합해야 우리 삶이 온전해지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다시 깨닫게 된다. 그래, 삶은 코로나바이러스가 아니어도 이미 위태로운 것이었다. 평범한 삶이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