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도시 남성의 옥상 경험은 세가지 정도로 압축된다. 공통분모가 가장 큰 옥상의 추억은 흡연일 것 같다. 추억보다는 현재진행형의 용도라 말해야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제아무리 리처드 클라인의 책을 인용해가며 ‘담배는 숭고하다’ 외친들, 담배는 이미 공공의 적이다. 성인 남성의 흡연율은 40%에 가깝지만 도시의 거의 모든 장소에 빨간색 금연 딱지가 붙어 있다. 옥상은 그나마 융통이 묵인되는, 1천만 흡연인의 해방구다.
옥상의 두번째 추억에는 으레 주먹이 등장한다. 옥상으로 올라와. 이 짧은 명령문 하나면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옥상은 선배의 군기 앞에 무릎 꿇는 복종의 공간이(었)고, 학교 폭력의 전시장이(었으)며, 갖가지 명분의 결투가 벌어지는 전장이(었)다. 청소년기에 옥상에서 겪은 사건들을 추억의 이름으로 포장할 배포가 없다면, 그곳은 긴 시간이 흘러도 아물지 않는 상처의 공간이다.
세번째 추억은 현실과 로망의 경계선상에 있다. 많은 이에게 옥상은 아련한 기억 저편의 사랑을 소환시키는 가슴 먹먹한 장소다. 뭇 남자들이 다 자기 이야기라고 우겼다는 히트작 <건축학개론>. 대학 새내기 서연과 승민의 어설픈 두번째 데이트 장소는 개포동의 어느 아파트 옥상이다. 이어폰 한쪽씩 나눠 끼고 듣는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 신체의 모든 감각을 무장해제시킨다. 옥상은 이렇게 감성마저 마비시키는, 아름다운 기억의 장소다.
그런데 요즘 옥상은 이 정도 수준이 아니다. 옥상이 동시대 문화와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일상의 풍경이 정말 다채로워지고 있다. 옥상에서 화분을 가꾸거나 상추를 기르며 짧게나마 노동의 희열을 맛보는 건 이미 고전이다. 더 진취적인 사람들은 블루베리 농사도 짓는다. 옥상을 녹화하거나 옥상을 이용해 빗물을 모아 기후변화에 대처한다는 거룩한 명분의 사업도 활발하다. 옥상에서 하늘과 별과 바람의 자유를 즐기며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는 건 드라마 주인공만이 아니다. 핫한 곳, 힙한 곳 가리지 않고 도심 도처의 옥상을 카페와 바가 접수하고 있다. 흉흉한 코로나 시대의 한가운데를 지나며 옥상의 공간적 가치와 역할이 새삼 재발견되고 있기도 하다.
운 좋게도, 내 자리에서 네댓 걸음만 내디디면 소박한 옥상 테라스(
사진)가 나를 환대한다. 여느 옥상처럼 어수선하게 방치되던 곳을 동료 교수가 정갈하게 디자인해 고쳤다. 꼼꼼한 디테일의 목재 데크, 녹슨 내후성강판 식재 박스, 어디선가 날아와 스스로 자란 야생의 풀과 꽃, 단정한 철제 의자와 테이블이 전부지만 그 조합의 시너지가 만만치 않다. 압권은 눈앞으로 달려오는 관악산의 풍광이다. 밑에서 올려다보는 산 풍경도 아니고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도 아니다. 짙은 산허리를 바로 뚫을 듯 대면할 수 있다.
옥상에 앉으면 아름다움을 누릴 권리가 찾아온다. 날이 밝아올 때와 해가 저물 때의 기온 변화를 피부로 감지할 수 있다. 도시의 초록이 봄과 여름과 가을에 어떻게 다른지 배운다. 감각의 연합, 즉 공감각이 책 속에만 존재하는 개념이 아님을 온몸으로 느낀다. 짜증나는 회의의 여파가 가라앉지 않을 때나 ‘발암 야구’가 남긴 피로감이 해소되지 않을 때면 옥상 산책만한 즉효약이 없다. 바삭한 공기로 눅눅한 생각을 말릴 수 있다.
오늘 오후엔 어느 졸업생이 보낸 엽서를 들고 옥상에 나갔다. 감염병의 소란에 지쳤지만 “그러는 사이 지구가 지치지 않고 돌면서 바람이 달라졌고 계절이 소리 없이 걸음을 옮겼어요”. 내 키보다 높이 자란 바늘꽃이 별무리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서걱한 바람과 포근한 구름과 예리한 햇살이 옥상에 가을을 채우고 있었다.
배정한 ㅣ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