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재 ㅣ LAB2050 대표
우리 시대, 지식의 쓸모는 어디에 있을까?
서점 베스트셀러는 지식의 소매시장 지형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다. 지난 몇 달간 서점 논픽션 베스트셀러를 훑어봤더니, 상위권에 든 단행본은 세 가지 분류를 벗어나지 못한다. 마법의 세 단어는 돈, 공부, 그리고 권력이다. 돈 버는 방법을 알려주거나, 공부에 도움이 되거나(그래서 시험에 합격해 지위를 높이고 돈을 버는 데 도움이 되거나), 아니면 한 정치세력의 입장을 대변해 ‘흑서’나 ‘백서’ 반열에 들어야 팔리는 책이 됐다.
이게 우리 사회 지식의 처지다. 뉴스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돈 내고 신문을 구독하는 사람은 멸종 위기다. 본격적 저널리즘을 추구하면서 유료 모델에 성공한 사례도 국내에서는 찾기 어렵다. 뉴스 매체들은 포털사이트 앞에 줄을 섰다. 클릭 수로 서열을 매기는 그 세계에서도 역시 마법의 세 단어가 통한다.
그나마 지식을 담은 연구물이 팔리는 통로는 정부와 공공기관이 발주하는 연구용역 과제다. 당연히 행정 관료나 공공기관 실무 담당자의 관심사에 맞추어 연구 결과가 만들어진다. 연구용역 단가는 연구 결과와는 상관없이 투입된 인력과 시간만을 기준으로, 책정된 예산에 맞춰 진행된다. 결과적으로 값싼 연구용역이 무수히 진행되고, 발주자 입맛에 맞는 몇 군데만 인용되고 나머지는 버려지고 만다.
원래 지식이란 그런 것일까? 적어도 자본주의가 자리를 잡던 전환의 시대, 근대 유럽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지식인과 예술가와 정치인이 어울렸고, 차와 와인을 마시며 악기를 연주하고 대화하며 교류했다. 국적과 지역과 성별을 가리지 않았다. 거기서 미래를 향한 아이디어가 샘솟았다.
그때 지식의 쓸모는 미래를 내다보고 설계하는 데 있었다. 이렇게 빚어진 미래 비전은 사회 변화의 동력이 됐다. 여기서 혁신적 사업 아이디어도 나오고 새로운 사상도 나왔다. 여기서 빚어진 사회 비전이 광장의 시민들에게 추인을 받으면 혁명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그들은 그런 공간을 살롱이라 불렀다. 작은 방에서 벌어진 토론에서 거대한 생각이 펼쳐졌다. 자본주의도 민주주의도 복지국가도 기획됐다. 그런 생각들을 바탕으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형성됐다.
모두가 목소리를 갖는 광장은 물론 중요하다. 서점 베스트셀러 매대도 인터넷 포털사이트도 광장이다. 다양한 목소리가 들끓는 가운데 공론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 19세기 유럽이 갖지 못했던 21세기 민주주의 사회의 거대한 잠재력이다.
그러나 좋은 광장과 나쁜 광장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무작정 의견이 들끓는다고 공론장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성숙한 의견이 들끓어야 광장이 괜찮은 공론장이 될 수 있다. 그렇지 못한 광장은 자칫 증오와 혐오를 양산하는 곳이 될 수도 있다. 소수의 의견이 묻히는 무덤이 될 수도 있다. 그 성숙한 의견을 미리 빚어내는 사람들이 지식인이다.
그래서 살롱도 광장만큼 중요하다. 지금 우리에게 없기에 더 중요하다.
지식인이 대중에게 정답을 가르치는 시대는 지났다. 하지만 가능한 다양한 답들을 먼저 숙고하고 토론하는 일은 여전히 의미가 깊다. 이제 직업적 지식인들은 그런 다양한 답을 미리 알아보고 실험하며 숙성시키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연설가가 아니라 실험가가 되어야 하며, 대중에게 도덕적 훈계를 하는 대신 미리 해본 실험 결과를 알려줘야 한다.
그래서 직업적 지식인들의 제자리는 구호를 부르짖는 광장의 마이크 앞이 아니다. 홀로 사색하는 독방도 아니다. 다양한 의견을 실험하고 숙성시키는 공간이다. 민간 싱크탱크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
정부와 싸우거나 야당과 싸우는 데 과몰입하지 말고, 과거와 싸우고 미래를 토론하는 공간을 마련해 보자. 마이크를 잡고 연단에 서기보다는, 평평한 바닥에 둘러앉아 보자. 같은 편끼리 만나지 말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 보자. 지금 세상에 모자라는 것은 돈의 흐름을 읽기 위한 지식이 아니라 바람직한 미래상을 쓰는 지식이다. 편들기 위한 지식은 넘쳐흐르니, 중심을 잡기 위한 지식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이야기를 안전하게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생각의 자유가 거침없이 꿈틀거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가장 절박해 보이는 시기일수록, 가장 여유로운 대화가 더욱 필요할 수 있다. 코로나19를 계기로 맞게 된 거대한 전환을 준비하기 위해, 다시 살롱의 시대를 열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