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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전지적 작가 / 김영준

등록 2020-10-30 16:24수정 2020-10-31 02:33

김영준 ㅣ 열린책들 편집이사

지식이나 지능을 자랑하는 소설 주인공처럼 안타까운 것도 별로 없다. (도덕과 양심을 자랑하는 것보다는 참아주기 쉬울 수도 있지만.) 왜 하필 소설 속에서 그러고들 있을까? 평소 단련이 되어 있다고 생각했지만, 전에 읽었던 어느 일본 추리소설은 정말 이상했다. 탐정이 화자를 겸하고 있는데 너무 머리가 좋아서 매 순간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럴 때 발생하는 곤란한 문제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왜 바로 범인을 잡지 않고 마지막까지 기다리고 있을까? 체포에는 때가 있는 법이라 그렇다 치고, 다음은 좀 더 큰 문제이다. 왜 화자(탐정)는 한참 전에 알아차린 범인을 독자에게 알려주지 않는 걸까? 아니 그 통찰의 한 조각이라도 미리 나눠주지 않는 걸까? 그럴 마음이 없다면 대체 왜 1인칭으로 말하고 있을까?

물론 그전에도 탐정의 1인칭 시점에서 전개되는 소설을 읽은 적이 몇번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 탐정이 범인을 깨달은 순간은 독자와 공유되기 마련이었다. 문제의 소설처럼, 결말에 “너희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겠지만” 하며 자랑하려고 숨기는 일은 없었다. 명색이 화자라는 사람이 그동안 독자에게 여러가지를 고의로 숨겨왔다고 의기양양하게 고백하는 걸 보고 있으니 정신이 아득했다. 책 제목은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다.

탐정이 추리력을 자랑하는 건 당연하다. 탐정이 1인칭인 것도 허용된다. (선호되지는 않는다. 홈스 대신 왓슨이 말하는 게 편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인칭 화자가 유리할 때 불리할 때 가려서 말하는 건 허용되지 않는다. 그건 부정직에 속한다. 부정직이라는 말이 기묘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알다시피 소설 자체가 꾸며낸 이야기니 말이다. 그러나 꾸며낸 이야기이므로 요구 사항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번잡한 논의는 생략하지만, 소설에서 부정직이라고 하면 대개 거짓을 들켜 진실처럼 보이게 하는 데 실패했다는 의미이다. 화자나 작가의 전지적 시점이 반칙에 의해 유지된다면 진실성 있게 보이기는 어렵다.

언제 독자는 소설의 화자를 믿게 되는가. 사실 독자는 진실성의 문제에서 그리 까다롭지 않기 때문에, 언제 화자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는가로 물음을 바꿔도 좋겠다. 답은 간단한데, 화자가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것처럼 보일 때 신뢰를 잃는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대화 상대방 등 타자의 모든 의도를 꿰뚫고 있는 슈퍼맨이라면 그런 책을 끝까지 읽어주기는 힘들 수밖에 없다. 작가가 자신을 전지전능한 창조자라고 느끼는 게 일이 잘 풀리고 있다는 뜻은 못 된다.

움베르토 에코는 친구가 쓴 어느 소설에 붙인 머리말에 이렇게 썼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것은 지식을 얻기 위함이다.” 현명하게도 그는 독자들이 소설로 배우는 게 어떤 종류의 지식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그는 소설이 얼마나 제대로 된 학습 도구일 수 있냐는 식의 반론을 회피할 수 있었다. 나는 에코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소설을 통해서 지식을 얻는다. 그런데 그 지식은 약간 진기한 종류의 것으로 다른 데서는 찾을 수 없다. 그것은 작가가 이미 알고 있던 지식이 아니라 새로운 상황에서,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비로소 발견하게 된 지식이기 때문이다. 뭔가 배웠다는 느낌을 주는 소설은 그런 것이다. 이 새로운 지식은 기존 지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거나, 혹은 모든 경우에 유효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좋은 소설은 불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무지를 숨기지 않고 행하는 탐구의 기록처럼 보인다. 사실 우리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게 많다고 느끼니 소설이 계속될 여지는 충분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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