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펀자브주에서는 1990년대 후반 펀자브어와 힌디어, 영어가 혼용된 ‘펀글리시 영화’가 유행하기도 했다. 펀자브어가 힌디어와 섞인 ‘펀디’가 영화나 노래로 인기를 얻고 다시 영어가 보태진 것이다. 사진은 당시 극장가.
책장을 정리하면서 1989년 폴 케네디가 쓴 <강대국의 흥망>을 모처럼 다시 보았다. 냉전 종식기에 화제가 되었던 이 책에서 그는 국가의 힘을 경제와 군사력 중심으로 분석했다. 그렇다면 국가의 흥망 과정에서 언어는 어떤 역할을 할까, 문득 생각했다. 약 193개 유엔 회원국 중 100여개 국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주로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는 서양 제국주의로부터 독립했다. 그 가운데 눈길을 끄는 언어정책 사례는 인도와 르완다다.
19세기 초부터 1947년까지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은 인도는 사회 전반에 영어가 깊이 뿌리를 내린 지 오래되었지만 동시에 한 나라에서 여러 언어를 쓰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런 까닭에 막상 독립한 뒤 공용어 선정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1950년 영어에서 벗어나 여러 언어 가운데 사용 인구가 가장 많은 힌디어를 공용어로 선택했지만, 힌디어를 거의 쓰지 않는 남부 지역 주에서 반발이 극심했고, 1964년에는 힌디어 사용을 반대하는 시위가 번지기도 했다. 그 결과 1965년에 이르러서 힌디어를 전국 공용어로 쓰는 대신 영어를 보조적 공용어로 사용하는 것을 대안으로 선택했다. 그로 인해 인도의 각 주에서는 힌디어와 영어 외에 자신들의 공용어를 따로 지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인도 전역에서의 영어 확산은 매우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2020년 여름, 인도 정부는 새로운 교육과정을 도입했다. 이번에도 언어 교육과정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인도 정부는 학교에서 세 개 언어를 가르치되 그중 두 개는 인도의 고유 언어여야 한다고 밝혔다. 힌디어를 필수로 지정하지는 않았지만 고유 언어 두 개를 가르쳐야 한다면 힌디어가 채택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이번에도 남부 지역, 특히 타밀나두주에서 크게 반발했다. 많은 학교에서 힌디어와 타밀어 두 개를 나란히 가르칠 거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결국 타밀나두주에서는 이전처럼 타밀어와 영어만 가르치겠다고 선언하고 나섰다.
르완다는 중앙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과 이웃한 작은 국가다. 1962년 벨기에로부터 독립한 뒤 극심한 민족 갈등으로 1990년대까지 치열한 내전과 학살을 겪어야 했다. 2000년대 접어들면서 점차 안정을 찾고 위기를 벗어나기 시작했는데, 1990년대의 어두운 역사는 이 나라의 언어정책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독립할 당시 르완다는 사용 인구가 많은 키냐르완다어를 국어로 선택했지만, 약 46년여 동안 벨기에의 지배를 받은 탓에 상류층 사이에서는 프랑스어가 넓고 깊게 보급되어 있었다.
변화가 일어난 건 2008년이었다. 1990년대 내전에서 승리한 세력은 오랫동안 영어를 사용해온 우간다와 매우 밀접한 사이이면서 프랑스와는 갈등이 심했다. 이들은 프랑스어보다 영어에 능통했고, 나아가 자신들의 조국 르완다가 영어권인 동아프리카 국가와 협력하길 원했다. 그렇지 않아도 1990년대부터 세계적으로 ‘글로벌 영어’가 국제 교류의 모든 분야에서 표준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이렇듯 영어에 대한 안팎의 호의적인 태도로 인해 르완다에서는 그 이전까지 키냐르완다어와 프랑스어로 이루어지던 초등학교 수업을 영어로만 진행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그렇다고 교실에서 영어 수업이 즉각적이고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리 없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2009년 대규모 영어 연수를 시행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해도 제대로 된 수업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자 2011년부터 초등학교 1~3학년 수업은 키냐르완다어로 진행하고 4~6학년은 영어로 진행하는 걸로 방향 수정을 거쳤고, 프랑스어는 이미 2008년부터 ‘외국어’ 과목으로 분류되었다. 그리고 이윽고 2019년 르완다 정부는 다시 한번 모든 초등학교 수업을 영어로 진행하는 것을 목표로 교육 현장과 소통하면서 장차 영어 수업으로 전면 전환할 것을 밝혔다.
인도와 르완다의 언어정책은 같은 듯 다르다. 식민 지배로부터의 독립 후 공용어 논쟁이 일어났고, 그 논쟁의 핵심이 결국 언어의 패권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점은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도는 지배계급의 언어였던 영어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으나, 힌디어 패권 장악의 견제로 인해 오히려 영어를 지속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르완다는 지배계급의 언어였던 프랑스어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유어 대신 이웃 나라 지배계급의 언어였던 영어를 선택함으로써 새로운 언어 패권을 확립하고 있는 중이다.
1989년 폴 케네디는 경제와 군사력이 국가의 흥망을 좌우할 거라고 했다. 21세기, 국가의 흥망에 언어는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나아가 한 나라의 언어정책과 개인은 어떤 상관관계를 가질 것인가. 나의 관심사는 거기에 가 있다.
로버트 파우저 ㅣ 언어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