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검은 생명 / 정영목

등록 2020-11-06 15:40수정 2020-11-07 14:23

정영목 ㅣ 번역가·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Black lives matter. 해외 축구 경기장에서도 보게 되었던 구호, 장소나 인종과 관계없이 편견과 차별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공감을 얻게 된 구호다. 우리 말로는 뭐라고 옮겨야 할까? 지인과 이야기를 하다가 기습적으로 물어보니 바로 “흑인 생명도 중요하다”는 답이 돌아온다. 왜 원문에는 안 보이는 “~도”라는 의미를 추가했을까?

물론 그가 이 말의 의미를 구성하는 맥락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 구호에 백인의 생명은 이미 충분히 중시되고 있다, 심지어 흑인의 생명을 희생하면서까지 중시되고 있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비슷한 생각을 담은 “All lives matter”라는 점잖은 표현보다 더 강렬한 구호가 나오게 된 데에는, 차별의 시정을 기대해봄 직한 공권력과 그 최고 수장으로부터 오히려 치명적 차별을 당한 최근의 사건들이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짐작했다. 나아가서 “White lives matter”가 그 자체로는 얼마든지 흠잡을 데 없는 표현이지만 실제로는 아무 말도 아니라고 누가 주장한다면 그는 기꺼이 동조했을 것이다. 반면 영어 문법에 통달한 외계인이 있다 해도 지구의 사정을 모른다면 이 표현의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 단순한 세 단어를 앞에 두고 그는 꽤 막막할 텐데, 사실 그가 이 표현에서 어떤 가능성을 떠올릴지는 상상하기 힘들다. 우리는 이미 이 표현의 의미를 규정하는 맥락에 들어가 있어 거기에서 벗어나 생각하는 것 자체가 힘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맥락을 공유하면서 의미가 송곳처럼 뾰족해지는 예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맥락이 허물어지면서 전에 없던 혼란이 생기는 일도 있다. 몇년 전 북한과 미국이 강하게 맞서던 시절 이런 말이 있었다. South Korea is finding, as I have told them, that their talk of appeasement with North Korea will not work, they only understand one thing! 북한과 유화적으로 대화하는 것은 자신이 말해주었듯이 효과가 없으며 남한도 이제 그 점을 확인하고 있다는 것이 앞부분의 내용이다. 이어서 그들은 오직 한가지만 이해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언뜻 보면 이때 “그들”은 남한을 가리킬 수도 있고 북한을 가리킬 수도 있을 것 같다. 이것을 만일 남한이라고 보려 한다면 이 부분은 남한이 어리석다고 책망하는 말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을 한 사람이 남한의 동맹국 대통령이라면 “그들”이 남한일 가능성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동맹국 대통령이 그렇게 대놓고 무례하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현실적 맥락에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동맹국 대통령이 트럼프라면?

이런 식으로 언어적인 면에서 전에는 나타나기 힘들던 혼란이 생겨날 빌미를 제공했다는 점에서도 트럼프는 남다른 공헌을 한 셈이다. 더군다나 이제는 선거를 포함하여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이루는 주요한 말들의 의미까지 다시 살펴야 할 판이다. 그 말들의 현실적 맥락, 많은 사람이 오랜 세월에 걸쳐 가까스로 합의해 놓은 기반을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한 특이한 개인의 일인 단막극으로 막을 내릴 거로 생각한다면 지나친 낙관일 것이다. 기존의 정치 질서로 포섭할 수 없게 된 힘들은 계속 새로운 대변자를 불러낼 것인데, 그와 더불어 말의 혼란 또한 깊어질 것이다. 하지만 말의 현실적 맥락은 무너지는가 하면 동시에 새로운 공감을 바탕으로 새 맥락을 창조하기도 한다. Black lives matte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