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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균형 맞추기 / 김영준

등록 2020-11-27 15:55수정 2020-11-28 02:34

김영준ㅣ열린책들 편집이사

은신처에서 발각된 줄리아와 윈스턴이 제복의 사내들에게 두들겨 맞는 동안 집주인 차링턴씨가 올라온다. 10초 전만 해도 윈스턴은 차링턴씨의 운명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집주인이 달라 보인다. 더 이상 사람 좋은 60대 아저씨가 아니라 날카로운 얼굴의 35세경의 사내가 서 있다. 초라한 골동품점은 덫에 불과했고 차링턴씨는 보이지 않는 두려운 존재, 사상경찰이었던 것이다. 이 부분은 소설 <1984>에서 가장 잊기 힘든 장면 중 하나이다. 엄습한 이질감이 얼마나 큰지 윈스턴은 차링턴씨의 키가 커졌다고까지 생각한다.

우리가 상상하는 배신 장면이란 대개 이런 식이다. 돌변, 위장, 놀라움이라는 세 요소가 한 세트로 나온다. 태도의 돌변과 인격을 위장해왔다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같은 것은 아니다. 돌변은 순간적이고 위장은 오랫동안 갈고닦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당하는 쪽에선 대개 한 가지 사건으로 경험된다. 배신감은 강렬할수록 놀라움을 동반하기 마련이지만, 이 놀라움이 역으로 배신의 정의를 흔들기도 하는 것 같다. ‘예상치 못했다’는 것이 배신의 주요 내용인 것처럼 우리가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 말 없었다면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할 일인데, 단지 조금 미리 나에게 귀띔해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용납 가능한 일처럼 보이게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놀라게 된다. 어째서 그렇게 되는지 이유는 모른다. 아마 우리는 신뢰받는다는 느낌을 좋아하고, 덕분에 놀라지 않게 되었다는 데 안도하고, 그것에 터무니없는 대가를 지급하는 데 익숙해진 듯하다.

우리는 돌변한 태도가 주는 놀라움이, 위장된 인격의 본질이나 배신의 실제 내용보다 더 큰 관심사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는 전적으로 겁에 질린 사람의 태도이다. 그러나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이들이 이 유리한 환경―놀라게 한 것만 사과하면 되는―을 잘 이용하는 것 같지도 않다. 차링턴씨처럼 직업적인 기만가가 아니라면, 자신의 일관성에 대해 일말의 회의도 갖지 않는 게 보통인 듯하기 때문이다. 기대나 신뢰를 저버렸다는 생각이 들 수가 없다. 기준이 다른 쪽에 있으니 말이다. 바깥에 드러난 행위의 일관성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자아상(自我像)의 일관성인 것이다. 무해한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저녁 모임에 참석한 사람이 다음날 아침 ‘나답지 않게 실없는 말을 너무 많이 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고 하자. 그가 그날 말을 해도 되고 아껴도 되는 여러 선택 앞에서 어떤 방향을 택할지는 짐작이 어렵지 않다.

우리의 언행은 기존의 자신의 언행에 무엇을 추가(+)하거나 취소(-)하려는 의도에서 나온다. 남의 말은 알아듣기 힘든 법인데, 취소라는 차원 때문에 우리의 의사소통은 한층 복잡해진다. 문제는 그가 주관적으로 뭘 취소하는지 타인이 알아차릴 길이 없다는 것이다. ‘이 사람이 오늘 거드름을 피우는 것은 어제의 경박한 언행을 취소하고 균형을 맞추기 위함이다’라고 생각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제는 광대 같더니 오늘은 더 바보 같다고 생각하게 될 뿐이다. 사실 그 이상으로 깊이 헤아려줄 의무가 타인에게 있을 리 없다.

본인만의 자아상에 매달리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 진부한 말이지만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고 인격의 균형을 유지하는 건 누가 대신 해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타인의 신뢰를 계속 침해하는 방식이라면 자문해봐야 할 것 같다. 자기 이미지라는 것도 결국 타인의 시선을, 관객을 가정하고 형성된 것이 아니었나? 아마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타인이 그가 기대하는 방향으로 그를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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