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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충걸의 세시반] 나, 태어나서 좋았어

등록 2020-12-06 15:58수정 2020-12-07 02:38

스무살 청년이 ‘이충걸의 세시반’을 먼저 읽고 그리다. 김예원
스무살 청년이 ‘이충걸의 세시반’을 먼저 읽고 그리다. 김예원

이충걸 | 에세이스트

스물다섯살이든 쉰다섯살이든 생일을 맞으면 모순된 감정이 가득해진다. 생일 축하 인사가 아무리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번쩍거려도, 생일 카드가 그렇게 소중하다 해도 생일은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생일 케이크에 꽂힌 촛불은 이 순간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며, 우리는 늙지 않을 도리가 없고 영원히 살 수도 없다는 것을 너울너울 일러준다.

내 주변엔 생일을 별다를 것 없이 무덤덤하게 보내고, 날짜도 까먹었으며, 태어난 게 하나도 기쁘지 않다는 초월적인 친구도 있지만, 자신에게 벌꿀처럼 풍부한 선물을 하는 친구도 있다. 나는 사찰에서 명상의 며칠을 보내고, 요가 학원에 등록하고, 티베트로 오체투지의 길을 떠나려는 그들의 결단을 찬미하면서도 그렇게 고결한 선물을 나에게 줄 순 없다. 금주(禁酒), 고전 백권 읽기, 체중 감량 같은 각오를 했다면 하루 종일 얼마나 마음이 무거울까.

어렸을 때 생일은 성인이 된다는 진실과 황홀한 자유의 시간이 임박했음을 알려주는 날이었다. 운전면허와 투표권을 동시에 가지는 18세의 특별함! 어느 해, 돋보기 없이 메뉴를 볼 수 없고, 의사가 자기보다 한참 어리며, 바리스타가 당신보다 열네살 딸의 비위를 맞추는 생일이 찾아온다. 생일의 친숙한 기쁨은 미묘한 경고로 변하고, 대관식 대신 공포를 닮은 희망이 모인다. 그리고 때맞춰 가세하는 자학의 유머. 생일 케이크는 마르고 싶은 갈망을 찢어버린다.

나이란 생일을 맞은 사람의 눈 속에 존재한다. 그는 아기였던 그때 이후 처음으로 자기 나이를 본다. 지구에서 보낸 세월이 얼굴에 나타난 순간, 귀리를 씹듯 낯선 비명이 깊고 길게 퍼진다. “세상에, 내가 마흔일 리가 없어!” 파자마를 입고 외출했다가 치아 사이에 파김치가 끼었다는 걸 알아챈 오후처럼. 장밋빛 뺨이 사라지자마자 들이닥친 노년의 여명처럼. 아무도 모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 단락의 끝에 무슨 표지가 있는지, 누가 힌트를 줄지. 생물학적 나이와, 심리적 주관의 나이와, 잘 살고 있다는 느낌을 결정짓는 염색체의 나이는 줄곧 불일치한다. 속으론 알고 있다. 이번 생일이 설사 괜찮아 보인다 해도 내년 생일은 그렇지 않다는 걸, 그다음 해 생일에도 똑같은 생각을 하리란 걸.

나는 늘 매일이 생일이라고 우겼다. “날 생(生) 날 일(日). 죽지 않고 눈뜨는 모든 날이 생일이야.”

나에게 생일은 무리하게라도 만들고 싶은 기억의 절차. 완전히 몰두시키는 축복의 힘. 하루만 노닥거리는 코믹 오페라. 폭풍의 바다에서도 무사하다고 전해주는 보험회사의 전보. 조항이 필요한 합의가 아닌 삶에 대한 일치.

나는 생일날, 머릿속 골방으로 들어가 섭섭한 머리로 일인칭 회고록을 쓰기 싫었다. 감퇴하지 않는 식욕처럼 맹렬하게 친구들의 축하를 받고 싶었다. 생일은 일년 내내 서랍에 집어넣고 손님이 오기 전에는 결코 꺼내지 않는 은식기가 아니니까. 생일은 나이에 걸맞은 행동을 명시한 사회 관념을 거부하는 날이니까.

어른도 아이들로부터 생일의 힌트를 얻을 필요가 있다. 그 애들은 생일이 돌아왔다는 것을 기뻐하고, 계속 자라는 자신에게 긍지를 가지니까. 그런데 아이들처럼 생일 촛불을 끄고, (물질로 표현되는) 마음의 선물에 정신 못 차리는 게 왜 그렇게 어려울까?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며 산다고 믿지만, 삶은 거꾸로 뒤돌아가야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생일의 야비한 모순이다.

생일은 달력으로 표시된다. (달력이라는 말은 ‘평가해야 할 시간이 된 날’이라는 라틴어 kalendae에서 기원했다) 내 생일은 11월, 성급한 겨울의 초반부지만 벌써 한해가 다 갔다고 말하지 않는다. 시간을 낭비했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그래도 자꾸 덮개를 바꾸는 비행기 출발 안내판 앞에서처럼 어쩐지 머뭇거렸다. 태어나 보니 세상은 이어폰을 꽂고 어슬렁거리는 안전한 쇼핑몰이 아니었다. 그러나 삶이 이런 줄 알았다 해도 모태에서 나를 죽일 순 없었을 것이다.

내부에서부터 붕괴되고 말 무상한 세상에서 나는 나의 미숙함을 인정한다. 핸디캡이 주는 박진성을 받아들인다. 성격의 불안정함에 관해선, 이슬람권의 카펫 제조공은 일부러 카펫 패턴을 불완전하게 짜서 악마가 스며들지 못하도록 한다는 변명도 준비하면서. 그러나 내가 아는 다른 사실은 행동하고 말하고 후회하고 바라고 망친 모든 날보다 생일을 맞은 오늘의 내가 더 낫다는 것이다.

점점 밤이 짧아진다. 친구들과 나, 아직 어린 마음에 낮보다 중요한 생일 밤이 저물어간다. 너는 결핍을 배워야 한다고 말해주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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