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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비핵화 정의’ 없는 비핵화 회담 파국을 맞다

등록 2020-12-15 18:20수정 2020-12-16 08:23

길윤형의 신냉전 한일전 _12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9년 2월28일 오전 베트남 하노이 메트로폴호텔에서 이틀째 만나 단독 정상회담을 하기에 앞서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하노이/AFP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9년 2월28일 오전 베트남 하노이 메트로폴호텔에서 이틀째 만나 단독 정상회담을 하기에 앞서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하노이/AFP 연합뉴스
한반도의 냉전 해체를 예언하는 ‘역사적 연설’이 될 뻔한 이날 연설의 숨겨진 핵심 발언은 따로 있었다. 비건이 북-미 간에 여전히 “비핵화가 수반하는 것에 대해 자세한 정의나 공통된 합의가 없었다”고 답한 것이었다. 정상회담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비핵화가 뭔지’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면, 어떻게 비핵화에 대한 의미 있는 합의를 이룰 수 있단 말인가!

김영철 조선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을 태운 베이징발 유나이티드항공 808편이 눈 내리는 워싱턴 인근 덜레스 공항에 도착한 것은 2019년 1월17일(현지시각) 저녁 6시32분이었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릴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 특별대표의 협상 파트너가 될 김혁철 북한 국무위원회 대미 특별대표와 김성혜 통일전선부 통일전선책략실장, 최강일 외무성 북미국장 대행 등 10여명이 그를 수행했다.

이튿날인 18일 낮 12시15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8년 6월 싱가포르 이후 7개월 만에 김영철과 다시 얼굴을 마주했다. 김영철은 이날 트럼프에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친서를 전달했다. 밥 우드워드의 저서 <격노>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친서에 “올해는 우리의 양자 관계가 한 단계 더 높은 단계로 발전하는 (지난해보다) 더 중요한 한 해가 될 것”이라고 적었다. 트럼프는 검은색 매직으로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당신의 친구 도널드 J. 트럼프”라고 쓴 손편지를 답장으로 건넸다. 그 직후 세라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은 성명을 내어 “트럼프 대통령이 비핵화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1시간 반 동안 김영철과 만났다. 두번째 (북-미) 정상회담이 2월 말께 열릴 것”이라고 발표했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의 일정은 정해졌지만, 핵심 현안인 ‘비핵화’에 대한 북-미 간 견해차는 여전한 상태였다. 이제 실무회담을 통해 ‘심연과 같은’ 의견 차를 좁혀야 했다. 1차 실무회담 장소로 정해진 곳은 ‘중립국’ 스웨덴이었다. 현장에서 비건을 기다리고 있는 이는 ‘강경파’인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이었다. 19일 스웨덴 스톡홀름 시내에서 북서쪽으로 50㎞ 떨어진 멜라렌 호숫가의 ‘학홀름순드 콘퍼런스’에서 2박3일간의 합숙 회담이 시작됐다. 협상을 촉진하기 위해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등 한국 대표단도 참석했다. 가파른 상황 전개에 당황한 일본도 가나스기 겐지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을 현지에 급파해 ‘재팬 패싱’을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2018년 3월 말 본격적인 북-미 대화가 시작된 뒤 일본이 경계한 것은 트럼프의 ‘섣부른 양보’였다. <아사히신문>은 20일 복수의 미국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미국이 비핵화의 첫걸음으로 북한이 가진 모든 핵 관련 시설 리스트를 제출(신고)할 것을 요구했지만, 북한은 이를 계속 거부하고 있다. 그로 인해 미국이 요구를 계속 누그러뜨리는 중이다. 성과를 연출하려는 트럼프가 ‘안이한 타협’을 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뿌리 깊다”고 우려했다. 현장에 급파된 가나스기는 21일 주스웨덴 미국대사관에서 회담을 끝낸 비건과 만났다. 그는 현장에 따라붙은 일본 기자들에게 “제재를 실시하거나 해제할 땐 타이밍이 중요하다”며 ‘제재 완화’엔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29일 논평을 내어 “일본이 미친 듯 대조선 압박을 고취하며 정세격화를 몰아오기 위해 발악하는 것이야말로 인류의 평화 염원에 대한 정면도전”이라고 맞받아쳤다.

존 볼턴은 북한과 교섭했던 비건 등 국무부 협상팀이 “회담을 성사시키려는 열의가 워낙 컸다”고 평했다. 비건은 볼턴이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이 요구하는 ‘행동 대 행동’의 공식을 고스란히 따르려 한다는 인상을 줬다”고 표현한 31일 스탠퍼드대 연설에서 매우 인상 깊은 말들을 남겼다. 트럼프에게는 “한반도에서 70여년간 이어진 전쟁과 적대를 종식시키려는 의지를 가진 지도자”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김정은 위원장에 대해선 “비핵화를 하고 자신의 열정을 온전히 북한 주민들의 필요와 경제 개발에 쏟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리더라 평했다. 그리고 마침내 북한이 오매불망 원했던 발언이 터져 나왔다. “북한이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FFVD)란 약속을 지킨다면”이라는 전제를 달면서도 미국이 “지난여름 싱가포르 공동성명에서 했던 모든 약속들을 ‘동시에 그리고 병행적으로’(simultaneously and in parallel) 추진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한반도의 냉전 해체를 예언하는 ‘역사적 연설’이 될 뻔한 이날 연설의 숨겨진 핵심 발언은 따로 있었다. ‘비핵화라는 용어가 어떤 뜻인지 북-미가 공유하고 있느냐’는 신기욱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장의 질문에 “비핵화가 수반하는 것에 대해 자세한 정의나 공통된 합의가 없었다”고 답한 것이었다. 정상회담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비핵화가 뭔지’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면, 어떻게 비핵화에 대한 의미 있는 합의를 이룰 수 있단 말인가!

2차 실무회담은 2월6~8일 평양에서 이뤄졌다. 비건은 6일 오전 10시께 평양에 도착해 8일 오후 5시30분까지 55시간 동안 김혁철과 협상을 진행했다. 서울로 돌아온 비건은 본국에 협상 결과를 보고한 뒤 앨리슨 후커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과 함께 밤 11시께 숙소인 광화문 포시즌스호텔 앞의 닭한마리집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복수의 한국 정부 고위관계자는 <한겨레>에 “평양 실무협상이 잘된 것으로 안다”고 밝혔지만, 비건은 11일 워싱턴을 찾은 문희상 국회의장 등에게 “양쪽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설명하는 시간이었다. 다음 회의부터 이견을 좁힐 것”이라고 말했다. 이 모든 일들이 모두 ‘안타까운 옛일’로 변한 뒤 퇴임을 한달여 앞둔 비건은 이달 8일 한국을 찾았다. 그는 10일 아산정책연구원 특별강연에서 “우리는 행동의 로드맵(일정표)을 짜는 데 합의했어야 했다. (그러나) 북한의 카운터파트가 비핵화에 대한 권한을 위임받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했다.

비건이 ‘권한 없는 상대’와 실무협상에 분주한 사이 ‘강경 매파’ 볼턴의 뒤집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볼턴의 회고에 따르면 백악관에서 하노이회담 준비를 위한 첫 회의가 열린 것은 12일 오후 4시45분이었다. 이 자리에서 볼턴은 트럼프에게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상대로 1986년 10월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벌였던 핵무기 군축협상 관련 동영상을 보여줬다. 레이건이 협상을 결렬시킨 뒤 과감히 회담장을 떠나는 모습이었다. 이 영상이 효과를 발휘했는지 트럼프 대통령은 “나는 서두를 것 없다”는 말을 되풀이하기 시작했다. 2차 회의는 15일 오후 2시를 약간 지난 시간에 시작됐다. 이 자리에서 트럼프는 볼턴에게 ‘완전한 비핵화’가 무엇인지 결론을 한 페이지에 정리해줄 것을 요구했다. 실무회담에서 합의되지 못한 ‘비핵화의 정의’를 초강경 매파인 볼턴이 만들어 트럼프에게 전달한 것이었다. 트럼프는 이 문서를 하노이에서 김 위원장에게 전하게 된다. 3차 회의는 21일 열렸다. 볼턴은 이날 회의에 대해 “마침 그 전날 트럼프가 아베와 통화한 터라 회의에 필요한 조건이 딱 맞아떨어졌다”고 썼다. 섣부른 타협은 절대 금물이라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집요한 설득이 이어졌을 것이다.

회담 성공이라는 ‘장밋빛 전망’에 취한 한국 정부는 점점 악화되어가는 백악관 내의 미묘한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19일 밤 10시 트럼프와의 전화 통화에서 “북한의 비핵화 조치를 견인하기 위한 상응 조치로서 한국의 역할을 활용해달라. 남북 사이의 철도·도로 연결부터 남북 경제협력 사업까지 트럼프 대통령이 요구한다면 그 역할을 떠맡을 각오가 돼 있다”고 말했고, 25일 수석·보좌관회의 머리발언에선 “역사의 변방이 아닌 중심에 서서, 전쟁과 대립에서 평화와 공존으로, 진영과 이념에서 경제와 번영으로 나아가는 신한반도 체제를 주도적으로 준비하겠다”고 선언했다.

북한이 ‘마침내’ 자신의 카드를 공개한 것은 하노이회담 첫날인 27일 밤 하노이 메트로폴호텔에서 열린 일대일 회담과 저녁 만찬에서였다. 김정은 위원장은 영변 핵시설을 폐기하는 대가로 2016년 이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취한 5개 결의에 따른 제재를 해제해달라고 요구했다. 복잡한 실무회담을 뛰어넘어 정상회담을 통한 ‘단판 승부’에 나선 것이다. 볼턴은 이 사실을 전하는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에게 “혹시 김정은이 다른 카드를 가지고 있는 것 같냐”고 물었다. 폼페이오는 “그런 것 같지는 않다”고 답했다.

28일 파국의 날이 밝았다. 오전 9시 시작된 회담에 앞서 김정은 위원장은 “우리가 훌륭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에 대해 마치 환상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오늘도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 하겠다”고 말했지만, 트럼프의 표정은 굳어진 채였다. 그의 신경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담당 변호사였던 마이클 코언의 27일 미 하원 공청회 폭로였다. 코언이 쏟아낸 말들 중 압권은 대통령이 불륜 상대였던 포르노 배우 스테퍼니 클리퍼드에게 입막음을 위해 13만달러를 지급했다는 것이었다. 동아시아의 냉전 체제를 단숨에 허물 수도 있었던 회담의 전망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트럼프는 성가신 듯 “노 러시”(No rush·서두르지 않는다)라고 세번 외친 뒤, “중요한 것은 옳은 합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시점에서 회담 결렬은 이미 정해진 것인지도 몰랐다.

※13회에선 하노이 파국 이후 본격화되는 ‘일본의 반격’에 대해 다룹니다.

길윤형 | 통일외교팀장.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 초년 기자 시절부터 강제동원 피해 문제와 한-일 관계에 관심을 갖고 여러 기사를 써왔다. 2013년 가을부터 2017년 봄까지 <한겨레> 도쿄특파원으로 근무하며 아베 정권이 추진해온 다양한 정책을 가까이서 살펴봤다.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아베는 누구인가>, <26일 동안의 광복> 등을 썼고, <나는 날조 기자가 아니다>, <아베 삼대>를 번역했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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