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국립중앙의료원 음압격리병동에서 의료진들이 코로나19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유족이 국립중앙의료원에 기부한 7천억원을 두고 정기현 국립중앙의료원장의 공개 발언이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정 원장은 24일 한 토론회에서 축사를 하던 말미에 “몇천억 기부금 들어왔다고 온갖 이해관계자들이 불나방처럼 붙고 기획재정부는 기부금을 자기 돈인 양 검증하겠다고 나서는데, 보건복지부의 정책 의지는 실종이다”라고 말했다. 거친 표현까지 써가며 작심 발언을 한 것이다. 정확한 내막은 밝히지 않았으나, 기부금 운용을 둘러싸고 볼썽사나운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암시한 것으로 보인다. 만에 하나 고인과 유족의 뜻이 훼손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라도 진상을 공개해야 한다고 본다.
이 회장 유족이 국립중앙의료원과 기부금 약정을 체결한 건 지난 4월28일이다. 유족 쪽은 중앙감염병전문병원 건립에 5천억원을, 감염병연구소 인프라 확충과 연구 지원에 2천억원을 쓰도록 용도를 지정했다. 이에 의료원이 구체적인 기부금 운용 계획을 수립할 ‘기부금운용관리위원회’ 구성을 복지부에 제안했는데, 석달이 지나도록 위원회 구성조차 못하고 있다. 복지부는 자기 부처 고위관료 출신을 위원장에 앉히려고 하고, 의료원 쪽은 공공의료 전문가 가운데서 위촉하려고 하면서 난항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관측이 사실이라면 복지부가 물러서는 게 맞다. 팬데믹 시대에 우리나라 감염병 치료와 연구의 중심 역할을 해야 할 병원과 연구기관의 건립 계획을 세우는 데 공공의료에 대한 신념과 전문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
애초 중앙감염병전문병원은 2026년까지 100병상 규모로 건립하기로 하고 2018년 12월 1294억원의 예산이 책정됐다. 이 계획대로라면 내년에 건물 설계와 전산 시스템 구축 등을 시작해야 하는데, 기재부가 최근 관련 예산 10억원을 전액 삭감했다. 명분이 없지는 않다. 기부금이 들어왔으니 사업계획을 수정해 외부기관의 적정성 검토를 다시 받아야 한다는 등의 이유를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절차만 다시 밟으려 해도 병원 준공이 1년 늦춰질 거라고 한다. 기부금에 의해 사업 규모가 커진 걸 두고 처음부터 절차를 다시 밟으라는 건 전형적인 관료주의적 발상이다. 불요불급한 지역개발 사업에 예비타당성 조사를 면제해주는 것과의 형평성까지 언급할 필요도 없다. 좋은 뜻에서 이뤄진 기부가 한시가 급한 병원 준공을 늦추는 이유가 되는 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노릇이다.
우리나라는 국민들의 협조와 의료진, 자영업자들의 희생으로 코로나19 초기 방역에 성과를 냈지만, 치료 인프라의 취약성도 여지없이 드러냈다. 다른 질병 치료를 포기한 채 코로나19 치료에 공공 병상을 모두 투입하고도 만성적인 병상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상황은 이미 예고된 것이기도 했다. 2015년 ‘메르스 사태’를 겪으면서 감염병전문병원 건립이 최우선 과제로 떠올랐으나, 경제성 논리로 계속해서 뒤로 밀리다 3년 만에 겨우 내놓은 것이 100병상 규모의 건립 계획이었다. 국가가 해야 할 공공의료 투자를 민간의 기부에 의존하는 것도 모자라 그 기부금마저 조직이기주의와 관료주의에 휘둘려 허투루 다뤄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