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김기현 원내대표를 비롯한 국민의힘 의원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공수처의 통신조회를 ‘불법 사찰’이라고 주장하는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국가인권위원회가 6일 수사기관의 통신자료 조회와 관련한 법·제도의 시급한 개선을 촉구하는 송두환 위원장 명의의 성명을 발표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통신자료 조회를 둘러싼 논란이 계기가 됐을 것임은 자명하다. 국민의힘과 일부 언론이 공수처의 통신자료 조회를 ‘불법 사찰’이라고 규정하고, 윤석열 대선 후보가 김진욱 공수처장의 구속까지 주장했던 것이 불과 일주일 전인데, 어느덧 다들 조용하기만 하다. 인권위 성명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문제는 처음부터 정치 공방이 아니라 법률과 제도 개선 차원에서 접근했어야 하는 사안이다.
인권위는 성명에서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지난달 24일 발표한 통신자료 제공 현황 자료를 인용했다. 2020년 548만4917건(상반기 292만2382건, 하반기 256만2535건), 2021년 상반기 255만9439건에 이른다. 인권위가 어림잡은 대로 국민 10명에 1명꼴이다. 일부 정치인과 언론인의 문제가 아니라 온 국민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수사기관의 통신자료 제공 요청에 아무 제약이 없다는 데서 찾아야 한다. 문서 1건당 통신자료 요청 건수(2021년 상반기)는 검찰 8.8건, 경찰 4.8건, 국가정보원 9.0건, 공수처 4.7건이었다. 갓 출범한 공수처가 금세 따라 할 만큼 통신자료 조회가 관행처럼 남용되어온 것이다.
통신자료 조회 남용은 일부 정치인과 언론인만이 아닌 온 국민이 피해자인 문제이고, 모든 수사·정보기관의 문제다. 인권위는 이미 8년 전인 2014년 2월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을 권고했고 2016년 11월엔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의견에서 통신자료 조회 남용이 법·제도의 문제임을 분명하게 짚었다. ‘자유권 규약 위원회’ 등 유엔 산하 기구들도 그 즈음부터 세차례나 법·제도의 개선을 권고했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정권 교체에 맞춰 여야가 공수를 교대하며 ‘사찰’ 공방을 벌였을 뿐 국내외에서 제시한 명확한 해법을 외면하더니, 이제 와 또다시 정쟁의 도구로만 소비하고 있다.
전기통신사업법 83조 3항은 수사·정보기관이 통신자료 제공을 요청하면 통신사업자가 이를 따를 수 있도록 할 뿐 적절한 통제 장치가 빠져 있다. 아무리 수사가 공익적인 활동이라 해도 통신자료 같은 개인정보를 제공할 때는 수사에 반드시 필요한 범위 안에서 최소한으로 허용해야 한다.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이를 위한 법률 개정안이 이미 5건이나 국회에 발의돼 있다. 여야는 지체 없이 법 개정 절차에 나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