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대한 정부 부처 업무보고가 이어지면서 우려했던 차기 정부의 재벌기업 편향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금산분리 완화, 출자총액 제한제 폐지, 기업 세무조사 대폭 감축, 법인세 인하, 기업에 대한 포괄적 수사 금지 요청 등 재벌기업 감싸안기 정책이 쏟아지는 양상이다. 사회 양극화 해소와 중소기업 공약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도 없다. 정부가 재벌기업의 대변자로 전락할 판이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금산분리 완화다. 금산분리는 재벌기업의 은행 지배를 막아 경제정의를 구현하고 시장경제 질서를 지키는 데 꼭 필요한 제도다. 세계 어디에도 기업이 은행을 마음대로 소유할 수 있는 나라는 없다. 세계 100대 은행 가운데 산업자본이 지배하는 은행이 넷뿐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금산분리를 완화해 재벌기업의 은행 소유를 허용하겠다는 것은 규제 완화가 아니라 재벌기업에 대한 특혜라고 볼 수밖에 없다. 출자총액 제한제도 역시 재벌기업의 문어발식 확장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폐지가 불가피하다면 순환출자 금지 등 보완책을 먼저 강구해야 한다.
법인세 인하도 누구를 위한 정책인지 의문이다. 우리나라 법인세율은 과세표준 1억원 초과 기업에 25% 세율을 적용하고 있다. 미국·일본·프랑스의 35%, 독일·영국의 30%보다 훨씬 낮다. 싱가포르·홍콩·아일랜드 등 몇몇 도시국가들만 우리보다 세율이 낮다. 게다가 법인세 인하로 큰 혜택을 보게 될 과표 1억원 초과 기업은 전체의 15.6%에 불과하다. 현금을 쌓아두고 있는 대기업의 곳간만 더 채워주는 꼴이다. 차라리 중소기업의 세율을 획기적으로 낮추는 방안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검찰과 국세청에 대한 인수위의 압박 또한 우려할 수준이다. 검찰과 국세청은 다른 어느 기관보다 정치적 입김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독립적인 판단에 따라 소신껏 일하도록 해야 한다. 기업을 살리기 위해 세무조사를 몇 번만 하라, 기업에 대한 포괄수사는 하지 말라는 식의 주문은 곤란하다. 미국이 탈세나 분식회계 등 경제 범죄에 대한 엄격한 법 집행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춰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차기 정부의 정책에 편승하려는 정부 부처의 줄서기도 가관이다. 특히 법무부가 ‘준법 마일리지 제도’를 도입해 일정기간 무분규, 무파업 기업에 대해 형사처벌 감경, 정부보조금 지급, 신용평가나 세제 혜택 등을 주겠다는 발상은 이해하기 어렵다. 평생을 법 한번 어기지 않고 살아 온 국민도 형사처벌을 감경해줄 근거가 없다. 세금을 깎아주는 법은 더더욱 없다. 어느 누구도 법 앞에서 특별 대우를 받아선 안 된다. 스스로 사회질서를 무너뜨리는 일이다.
사회 양극화를 해소하고 우리 경제의 성장 잠재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중소기업을 살리고 서민과 중산층의 소득 기반을 든든히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고용이 늘고 내수 여력이 커져 우리 경제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 퍼주기식 재벌 정책으로 경제를 살리겠다는 것은 정도가 아니다. 그렇게 해서 경제가 살아나지도 않는다. 친기업 정부가 되겠다는 것까지 나무랄 뜻은 없다. 하지만 소수의 재벌기업만 특혜를 받고 모든 것을 독식하는 경제체제는 결코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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