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의 ‘부림’ 사건과 1991년의 ‘유서 대필’ 사건에 대한 재심에서 나란히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각각 33년과 23년 만에 조작의 진상이 밝혀졌으니 사필귀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당사자들이 그동안 감당했을 고통을 생각하면 진실 규명이 늦어도 너무 늦었다. 특히 몹쓸 병까지 얻어 투병 중인 강기훈씨로서는 누명을 벗었다는 후련함보다 원통함과 아쉬움이 더 짙게 남을 것이다.
서울고법 형사10부는 13일 “1991년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김기설씨의 유서와 같은 흘림체끼리 비교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며 애초 필적감정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고 밝혔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릴 정도로 우리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몰고 왔던 이 사건의 진실이 뒤늦게나마 바로잡히긴 했으나 이번 판결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교훈은 자못 무겁다.
당시 시대상황 속에서 진실을 지켜내야 할 사법·언론 등 어느 한 분야도 제구실을 못 했다는 사실을 엄중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일차적으론 황당한 사건을 기정사실로 만드는 데 일조한 판검사들의 통절한 반성이 요구된다. 정통성이 부족한 권력에 항거하는 대학생 등의 시위와 분신이 잇따르자 6공 정권은 공안정국 조성에 나섰고 급기야 ‘유서 대필’이란 해괴한 사건을 만들어냈다. 국과수는 애초 흘림체인 유서와 정자체를 비교할 수 없다며 난색을 표시했다가 검찰의 재감정 요청에 응하는 등 감정 과정부터 논란거리였다.
감정 결과의 신빙성을 두고도 끊임없이 의문이 제기됐다. 이번 재심 재판부가 흘림체끼리 비교하지 않은 사실을 지적한 것을 보면 당시 무리하게 필적감정과 기소를 밀어붙인 검찰과 허술한 증거를 쉽사리 믿고 진실을 외면한 법원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일찍이 조작 가능성을 감지하고도 서둘러 진실을 파헤쳐 좀 더 빨리 진상 규명을 독려하지 못한 언론의 책임 역시 가볍지 않다. 앞으로 남은 절차만이라도 서둘러서 강씨의 물적·정신적 고통을 덜어주는 재판이나마 속히 마무리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부림 사건 재심 재판부 역시 무죄 판결을 내리면서 불법감금과 자백 강요 등 수사기관의 불법행위를 인정했다. 최근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변호인>이 흥행에 성공하자 당시 수사검사들은 고문은 없었다며 영화 자체를 허구로 단정했다. 일부 수구·보수 언론들은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국가보안법 유죄가 재심에서도 뒤집히지 않았다며 부림 사건의 조작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영화와 그 실제 주인공을 폄하하는 인사들의 주장을 전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그러나 사건 관련자들 가운데 이호철·설동일씨 등이 참여정부 당시 청와대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각각 근무 중이어서 애초 진실화해위에 진상규명 신청을 않았던 점 등을 고려하면 사건 피해자들과 영화를 섣불리 깎아내릴 일은 아니었다. 뒤늦게나마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무죄와 함께 사건이 조작으로 밝혀진 마당에 이에 가담한 가해자들, 특히 경찰과 검찰 등 조작에 앞장선 인사들의 통절한 반성을 촉구한다.
강기훈과 ‘시간’ [한겨레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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