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오렌지혁명(시민혁명)으로 주목받았던 우크라이나가 국가 정체성과 직결된 정책 노선을 둘러싸고 심각한 내분을 겪고 있다. 대통령이 22일(현지시각) 수도를 떠나고 야권이 정국 주도권을 장악했으나 러시아계 주민이 많은 동남부 지역의 반발이 우려된다. 자칫하면 나라가 두 쪽으로 갈라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사태가 여기까지 온 데는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노골적인 친러시아 성향과 비민주적 태도가 크게 작용했다. 그는 지난해 11월 말 자유무역협정 등 유럽연합(EU)과의 포괄적인 협력협정 체결 노력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해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유발했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의 강한 압력이 있었으며, 경제난을 겪는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로부터 150억달러를 지원받기로 했다. 이후 시위가 이어지다가 야누코비치가 며칠 전 발포를 허용해 100명 이상이 숨지는 참사가 벌어졌다. 정책 노선의 차이를 민주적인 방식으로 풀지 못한 무능력이 유혈사태의 주된 원인인 셈이다.
야누코비치가 떠났다고 해서 사태가 쉽게 진정될 것 같지는 않다. 야권이 독주할 조짐을 보이면서 인구의 17%를 차지하는 러시아계 주민은 경계심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연합 등 서방과 러시아가 어떤 태도를 취할지도 큰 변수다. 서방 나라들에는 이번 일을 제2의 오렌지혁명으로 보고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위기가 적잖다. 러시아도 지난 10여년 동안 강화해온 자국 중심의 블록에서 우크라이나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서 유럽으로 이어지는 송유관과 가스관의 90%가 지나가고 러시아 흑해함대가 주둔하고 있기도 하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더 큰 위기로 치닫지 않으려면 어떤 나라든 무력 개입을 시도해선 안 된다. 이는 특히 러시아에 해당한다. 만약 프랑스만한 크기에다 인구가 4500만명에 이르는 우크라이나에서 내전이 벌어진다면 그 파장은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우크라이나인들이 민주적이고 투명한 절차를 통해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은 사태 해결에 필수적이다. 또 민족적 갈등이 불거지지 않도록 자제하고 국민통합 유지라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 이와 관련해 “러시아 및 유럽연합과 공통으로 경제적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핀란드 모델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전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말은 새겨들을 만하다.
각국은 우크라이나인들이 스스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한발 물러서서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치적 의도를 갖고 섣부르게 개입하려 하다가는 사태를 더 복잡하게 만들 위험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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