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방호방재법 개정안 처리 문제가 갑자기 정국의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새누리당은 야당을 향해 “국가적 망신을 시키기 일보 직전”, “새정치연합은 새정치라는 단어를 쓸 자격이 없다” 등의 거친 표현까지 써가며 법안 통과를 전방위적으로 압박하고 있다. 반면에 야당 쪽은 “방송법 개정안 등 여야가 합의한 법안을 함께 처리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원자력방호법 처리 문제가 이렇게 꼬이게 된 가장 큰 책임은 정부여당에 있다. 이 법안은 이미 2년 전에 정부가 발의한 것이었는데도 여권은 계속 뒷짐을 지고 있다가 박근혜 대통령의 헤이그 제3차 핵안보정상회의 참석이 코앞에 닥치자 부랴부랴 법석을 떨고 있다. 여권은 자신들이 법안 통과에 무관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여러 정황상 변명일 뿐이다. 정홍원 국무총리가 강창희 국회의장을 만나 “시급성을 충분히 설명드리지 못한 점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말하고, 강 의장 역시 “나도 전혀 몰랐다”고 말한 것을 봐도 여권의 직무유기는 분명하다. 정부여당은 야당한테 책임을 덮어씌우기에 앞서 자신들의 무관심과 아마추어리즘을 탓해야 옳다.
여권이 ‘국격’이니 ‘국가 망신’이니 하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더욱 실소를 자아낸다. 이 법안이 2012년 서울에서 열린 제2차 핵안보정상회의에서 도출된 약속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헤이그 회의에 앞서 깔끔하게 통과시켜 놓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회의에서 개정 핵물질방호협약을 2014년까지 발효하기로 합의한 것을 고려하면 엄밀히 말해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아 있다. 박 대통령으로서는 법안 통과가 안 된 상태에서 회의에 참석하는 게 체면이 깎이는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국가적 망신이니 하는 말은 과장이다. 오히려 한국이 국가적으로 크게 망신당한 사건은 딴 데 있다. 국가정보원 간첩 증거 조작 사건에서 국정원을 변호하기 바쁜 새누리당이 국가적 망신 등을 입 밖에 낼 자격이 있는지 참으로 의문이다.
그럼에도 야당은 대승적인 견지에서 원자력방호법을 처리해주는 게 낫다. 새누리당의 태도야 얄밉기 짝이 없겠지만 방송법 등과의 ‘연계 처리’만을 고집하는 것도 능사는 아닌 듯하다. 야당이 여권의 다급한 사정을 약점 잡아 배짱을 부리는 모습으로 비치는 것도 별로 보기 좋지 않다. 어차피 법안 내용 자체에 이의가 없다면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대범하게 처리해주는 것이 성숙한 태도다. 그것이 정치다. 어쨌든 나라 밖에 나가 있는 박 대통령의 체면도 고려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다음에 새누리당이 어떻게 나올지는 한번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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