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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사설] 후진적 인권수준 드러낸 ‘사랑’ 말뜻 변경

등록 2014-04-01 19:01수정 2014-04-01 21:20

사전은 언어 사용의 기준 노릇을 한다는 점에서 말의 법전이라고 할 수 있다. 사전이 말뜻을 어떻게 그리느냐에 따라 생각의 폭이 넓어지기도 하고 좁아지기도 한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의 ‘사랑’에 관한 뜻풀이가 이성애를 기준으로 삼은 과거로 되돌아갔다는 사실이 엊그제 알려졌다. 언어 사용에서 차별을 없애고 소수자 인권을 보호하려는 우리 사회의 노력에 제동이 걸린 셈이다.

국립국어원은 2012년 “이성애 중심적인 언어가 성소수자 차별을 낳는다”며 사랑의 정의를 바꾸자는 제안을 받아들여 사랑을 비롯해 연애·애정·연인·애인 등 다섯 단어의 뜻을 성 중립적으로 바꾸었다. 그랬다가 기독교단체 등 일부에서 “동성애를 조장한다”며 재수정을 요구하자, 결국 1월 사랑의 뜻을 2012년 개정 이전으로 되돌렸다. 이에 따라 ‘사랑’은 “어떤 상대의 매력에 끌려 열렬히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에서 “남녀 간에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으로 뜻풀이가 다시 바뀌었다. 성소수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의 사랑을 담아낼 수 있는 뜻이 이성애로 한정되고 만 것이다.

국립국어원은 원상회복에 대해 “사랑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그런 전형적인 쓰임이 사전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수용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런 해명이야말로 성과 관련한 인권의식의 부재를 보여준다. 이성애는 정상이고 성소수자의 사랑은 비정상이라는 사회적 편견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성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이 “‘다름’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가 되도록 내디뎠던 한 발자국을 되돌려버렸다”며 재수정을 규탄하고, 국제앰네스티 대학생네트워크가 “다양한 사랑의 형태를 포괄하지 못하는 언어는 그 자체로 인간에 대한 차별이자 폭력”이라고 비판한 것에 국립국어원은 귀를 귀울여야 한다.

플라톤의 <국가>에는 우리가 흔히 ‘플라토닉 러브’(플라톤적 사랑)라고 부르는 사랑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플라톤은 연상의 남자가 연하의 상대방에게 지나치게 탐닉해서는 안 되며 절제로써 상대방을 이끌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사랑의 주체들은 남자-여자가 아니라 남자-남자다. 플라톤적 사랑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랑의 형태는 여러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특정한 형태만을 정상으로 고집하게 되면 배제와 차별의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내게 된다.

국립국어원의 윤리헌장에는 “국민 누구나 자유롭게 소통하는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언어에 대한 차별과 소외가 없는 다원적 언어정책 수립에 노력한다”는 구절이 있다. 이 윤리헌장에 맞게 국립국어원은 과거회귀 행위를 성찰하고 ‘언어 속 인권’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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