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준 국정원장이 15일 국정원 간첩혐의 증거조작 사건에 대해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참담” “책임 통감” 등 표현은 그럴듯했지만 막상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오히려 사과 성명의 핵심은 ‘내가 계속 국정원장을 하도록 기회를 달라’는 데 방점이 찍혀 있었다. 기자들의 질문도 받지 않고 일방적으로 끝내버린 이날의 대국민 사과는 하나의 요식행위에 불과할 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진정성도 느껴지지 않았다.
남 원장이 대국민 사과에서 보여준 모습은 몰염치와 오만함의 극치다. 국정원의 최고책임자로서 조직이 저지른 총체적 국기문란 행위가 이 정도 드러났다면 창피해서라도 그 자리를 떠나겠다고 나서는 것이 정상이다. 게다가 그는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무단 공개하면서 “국정원의 명예”까지 들먹인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는 체면이나 염치 따위를 모두 버렸다. 그동안 ‘강직한 이미지’를 자랑하던 것과는 딴판으로 부하인 2차장을 희생양 삼아 자신은 살아남겠다는 비겁한 모습만 보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국민을 향해서는 ‘대통령이 나를 보호해주는데 너희가 어떻게 할 거냐’는 뻔뻔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국정원 증거조작 사건을 통해 여실히 증명된 것은 남 원장의 ‘무능’과 ‘거짓’이다. 그는 국정원을 제대로 관리하지도 못했고, 기민한 판단을 내리지도 못했으며, 직원들을 올바르게 지휘하지도 못했다. 거기다 그는 정직함과도 거리가 멀었다. 증거조작 사건이 터진 뒤 줄곧 진실을 감추고 수사를 방해하는 데만 급급했다. 국정원의 조직 특성 등을 고려할 때 ‘위조는 없었다’는 내용의 자체조사 보고서가 만들어진 것부터가 남 원장의 직접적인 관여 없이는 어려운 일이라는 게 일반적 관측이다.
남 원장은 자신의 유임의 근거를 국정원 개혁에서 찾았다. 그는 넉달 전에도 국정원 ‘셀프개혁안’을 만들어 내놓으며 “국민이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국정원으로 거듭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고 있는 순간에도 국정원은 증거를 조작하고 진실을 은폐하기 위한 온갖 농간을 부렸다. 그래 놓고 이날 또다시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국민이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국정원으로 거듭나겠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남 원장은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개혁의 대상이다. 국정원 개혁의 요체는 남 원장의 직무유기와 진실 은폐 행위의 진상을 낱낱이 밝혀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남 원장의 사임이야말로 국정원 개혁의 시발점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날 “국정원이 또다시 국민들의 신뢰를 잃게 되는 일이 있다면 반드시 강력하게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이 이 정도로 국정원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것쯤은 개의치 않겠다는 뜻이니 참으로 기가 막힌다. 박 대통령은 “국정원의 환골탈태”도 주문했다. 하지만 ‘무능하고 거짓된 국정원장’이 이끄는 조직은 백년을 가도 환골탈태는커녕 여전히 ‘무능하고 거짓된 국정원’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박 대통령은 외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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