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라면 너무 황당한 개그고, 코미디라면 너무 슬픈 코미디다. 박근혜 대통령은 26일 정홍원 국무총리의 사표를 반려하고 ‘경질 총리 유임’이라는 기상천외한 결정을 내렸다. 총리 지명 문제를 놓고 두 달 동안 난리법석을 떨더니 ‘도로 정홍원’으로 마침표를 찍어 버린 것이다.
박 대통령의 결정은 세월호 참사를 잊겠다는 공식 선언이다. 정 총리가 사표를 낸 것은 세월호 참사에서 보인 정부의 부실대응에 책임을 지겠다는 의미였다. 대통령이 자리에서 물러나도 시원찮을 형편이었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으니 총리가 대신 책임을 진 것이었다. 그런데 그 총리를 다시 유임시킨 것은 바로 세월호 참사도,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도 완전히 잊겠다는 의사표시다. ‘절대 잊지 않겠다’던 박 대통령의 눈물은 역시 가짜였다.
정 총리 유임은 국가운영 포기 선언이다. 인물을 고르고, 검증을 하고, 국회 인사청문회를 통과하도록 노력하는 것은 대통령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다. 새 총리를 고르겠다는 것은 국민과의 약속이기도 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그런 의무를 회피하고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그리고 새로운 총리 한 명 고를 능력이 없는 무능한 대통령임을 스스로 만방에 고했다. 이것을 두고 고육책이니 미봉책이니 하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무책임과 무능으로 도대체 어떻게 나라를 끌고 가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국민 우롱이요, 국민 무시다. 박 대통령이 총리 지명에 두 차례나 실패한 것은 특유의 수첩인사, 소홀한 검증, 제대로 된 인사시스템의 부재 탓이다. 청와대가 인사수석실 신설까지 들고나온 것도 이런 문제점을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심기일전해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새 총리 후보자를 고르기는커녕 ‘정 그러면 예전 총리로 가버리겠다’고 어깃장을 놓아 버렸다. 박 대통령의 이번 결정에는 ‘인사는 내 고유권한인데 누가 뭐라고 할 거냐’는 오기가 가득 차 있다. 이미 보따리를 싼 총리를 유임시키는 대통령이나, 붙잡는다고 슬그머니 주저앉은 총리나 모두 염치없고 부도덕하기 짝이 없다.
정 총리 유임은 국가개조 포기 선언이기도 하다. 새로운 총리가 이끄는 내각에 국가개조 임무를 맡길 것이라는 말을 몇 차례씩 되풀이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박 대통령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세월호 참사의 책임이 있는 ‘헌 총리’에게 새로운 국가 만들기 작업을 시키겠다고 나선 꼴이 됐다. 대통령이나 총리 모두 이제는 국가개조니 새로운 국가 건설이니 하는 말을 할 자격도 없다.
이미 정 총리의 유임은 세간의 조롱거리가 돼버렸다. 나라 안뿐 아니다. ‘경질 총리 유임’은 여러 나라에서 해외토픽으로 등장했으니 이런 국가적 망신이 없다. 그동안 박 대통령의 실책과 판단착오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이번 경우는 차원을 달리한다. 박 대통령은 돌이키기 어려운 치명적인 잘못을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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