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임된 길환영 사장의 잔여 임기를 채울 <한국방송>(KBS) 새 사장 공모가 지난 30일 마감됐다. 지원자 30명 가운데 공영방송 위상 회복이라는 당면 과제를 해결하는 데 부적격인 인사들이 대거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특히 문제인 것이 그동안 한국방송 구성원들이 줄기차게 요구해온 사장 선임 절차 개선 요구가 묵살됐다는 사실이다. 한국방송 이사회는 이날 특별다수제와 사장추천위원회 구성 안건을 놓고 표결을 벌였으나 여당 추천 이사들의 반대로 하나도 채택되지 못했다. 길 사장 해임 이후 한국방송 이사회가 몇 차례 회의를 열어 이 안건을 다뤘는데 결국 아무 결과도 없는 형식적인 논의에 그치고 만 셈이다. 껄끄러운 사안을 들고 시간 끌기 하다가 팽개쳤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특별다수제와 사장추천위 구성은 권력의 충견 노릇을 하는 사장의 출현을 막고 한국방송을 정상화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지난달 언론노조 한국방송본부(새노조)가 전 직원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도 절대다수가 특별다수제(89.2%)와 사장추천위원회 구성(85.7%)에 찬성한 것으로 드러난 바 있다. 이 설문조사에서 또 한국방송 구성원들은 차기 사장이 갖추어야 할 조건으로 ‘정치적 독립성’(77.1%)을 꼽았다.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한국방송의 제1과제이며, 이런 과제를 해결하려면 사장 선임 과정에 특별다수제와 사장추천위가 꼭 필요하다는 것이 한국방송 내부의 일치된 의견이었다. 그런데도 이날 한국방송 이사회는 내부 구성원들의 간절한 바람을 외면해버렸다.
한국방송 이사회의 지금 상황은 길환영 사장을 뽑은 2012년 10월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때도 야당 추천 이사들은 낙하산 사장을 막으려면 특별다수제가 필요하다고 요구했고, 여당 추천 이사들은 끝까지 반대했다. 그 결과가 길환영의 등장과 불명예 퇴장이었다. 한국방송 이사회가 그 길을 다시 가고 있는 걸 보면, 세월호 참사로 한국방송이 겪은 수모를 벌써 잊은 듯하다. 여당 추천 이사들이 정권의 입맛에 맞는 제2의 길환영을 사장으로 찍어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인다면, 한국방송 내부가 다시 절망과 혼란에 휘감길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이런 사태의 최종 책임이 이사회를 사실상 좌우하고 있는 박근혜 정권에 있음은 물론이다. 제2의 길환영 만들기 강행은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불신과 반감을 돌이킬 수 없게 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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