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이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를 상대로 낸 고소를 검찰에서 각하 처분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고 한다. 국정원은 표 전 교수가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이 터진 뒤인 지난해 1월 신문 칼럼에서 ‘국정원의 위기’를 지적하며 “국정원이 국제 첩보 세계에서 조롱거리가 될 정도로 무능화·무력화돼 있다” 등의 글을 쓴 것을 문제삼아 고소했으나 오히려 망신만 당하고 끝난 셈이다.
정부 또는 국가기관이 형법상 명예훼손의 피해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광우병 피디수첩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례로 굳어진 사안이다. 이런 법리 문제를 떠나 국정원은 애초부터 표 교수의 글에 대해 고소장을 낼 자격조차 없었다. 대선 개입뿐 아니라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무단유출, 간첩사건 증거조작 사건 등 잇따른 국기문란 행위로 국정원이 “국제 첩보 사회에서 조롱거리”로 등장한 지는 이미 오래다. 훼손당할 명예랄 것도 없이 만신창이가 된 집단이 명예를 들먹이며 고소장을 낸 것부터가 한편의 코미디였던 셈이다.
검찰이 비록 각하 처분을 내리긴 했지만 시간을 끌며 미적댄 것도 별로 유쾌하지 않은 대목이다. 검찰은 지난해 1월 고소장이 접수된 뒤 계속 결정을 미루다 올해 2월 말에야 비로소 각하 처분을 내렸다고 한다. 국정원과 청와대 등의 눈치보기 때문이 아니라면 이런 명백한 사안을 두고 그렇게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국가기관이 명예훼손죄를 악용해 고소를 남발하는 일은 이명박 정권을 거쳐 박근혜 정권 들어서서 더욱 심해지고 있다. ‘피디수첩’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 이후에는 조직이 직접 나서지 않고 ‘대리인’을 내세우는 꼼수도 부리고 있다. 고소 남발은 청와대도 예외가 아니다. 청와대는 ‘세월호 참사 보도’와 관련해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한겨레신문사와 기독교방송(CBS)을 상대로 정정보도 및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낸 상태다. 청와대 역시 국정원이 감찰실장을 앞세운 것처럼 김기춘 비서실장, 박준우 당시 정무수석 등 4명을 원고로 내세웠다.
소송을 제기했다가 패소(각하)당하면 창피를 느껴야 하는데도 우리 정부와 권력기관들은 그런 감각마저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국정원이 민간인 사찰 의혹을 제기한 박원순 서울시장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가 패소를 당한 경험이 있으면서도 또다시 쓸데없는 고소전을 벌인 것이 단적인 예다. 쓴소리가 나오면 깊이 새겨듣고 개선할 생각을 하기는커녕 명예훼손 소송에나 골몰하는 것 자체가 그 조직에 미래가 없다는 뜻이다.
표창원 "분노와 그 분노를 조절하는 폭 넓은 능력을 가졌으면..." [한겨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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