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케이(SK)하이닉스가 반도체공장에서 백혈병 등 직업성 질환이 발생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정밀 실태조사에 나서기로 했다. 이와 관련한 <한겨레>의 심층기획취재 기사가 나온 지 2주 만에 회사 쪽에서 전향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다. 자기 회사 노동자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문제를 이제야 제대로 조사하겠다니 때늦은 감이 있지만 아무쪼록 철저한 피해 보상과 재발 방지 대책이 나오길 기대한다.
하이닉스 반도체공장의 직업병 문제는 이른바 ‘삼성 백혈병 논란’에 가려 지금까지 사회적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2012년 하이닉스가 에스케이그룹에 인수되기까지 경영난에 놓였던 상황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취재 결과 1995년부터 2010년까지 하이닉스 반도체공장에 몸담았거나 여기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 가운데 적어도 13명이 백혈병 등 림프조혈기계 질환 탓에 숨진 것으로 확인됐다. 같은 기간 삼성전자 반도체사업장에서 확인된 사망자보다 더 많다. 발병률과 사망률도 삼성전자에 못지않게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동안 하이닉스가 부실한 안전관리를 감추지 않았느냐는 의혹마저 나오고 있다.
하이닉스는 이런 의혹에 따른 비판 여론에 발빠른 대응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삼성전자와 마찬가지로 직업병 발생과 작업 환경 사이의 인과관계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는 산재보험 운용기관인 근로복지공단의 판정이나 법원 판결에 기대겠다는 태도다. 이래서는 문제 해결에 대한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 그동안 반도체공장의 질병에 대한 공적 기관의 산재 인정 기준은 의학적 타당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무엇보다 작업 환경과 질병의 연관성을 피해자가 입증해야 한다는 게 현행 산재보험제도의 치명적 약점으로 꼽혀왔다. 반도체공장처럼 수시로 작업 환경이 바뀌고 투입 물질 등에 대한 정보 제공이 제한된 여건에서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최종 입증 책임을 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헛된 공방을 벌이기보다는 이제는 반도체 노동자의 직업병 피해가 끊이지 않는 비극을 막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기준으로 하루 평균 5명의 산재사망 사고가 발생하면서 산재사망률 세계 1위라는 오명을 얻고 있다. 명색이 선진국 문턱을 바라보는 나라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세계 메모리반도체 시장의 1위와 2위 점유율을 자랑하는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는 오명을 벗기 위해서라도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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