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 수 있는 제안을 할 것으로 기대됐으나 그렇지가 못했다. 과거사 문제 해결에 소극적인 일본에 대해서도 원칙적인 언급에 그쳤다. 최대 정치현안인 세월호 특별법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군 폭력과 경제 활성화 등 다른 국내 사안과 관련해서도 기존 발언을 되풀이했다.
북한과 관련된 새로운 내용은 하천·산림 관리 공동협력 사업, 북한 대표단의 10월 평창 ‘생물다양성협약 당사국 총회’ 참석 초청, 마을 생활환경 개선 협력, 내년 광복 70돌 공동기념 문화사업 준비 등으로 요약된다. 모두 남북관계의 큰 흐름과는 거리가 있는 내용이다. 최대 관심사인 5·24 조치 해제 문제와 금강산관광 재개 등은 비켜가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최근 북한이 거듭 비판하는 체제통일(흡수통일) 우려를 덜어주기 위한 언급도 없었다. 이래서는 남북관계 전환의 계기가 만들어지기 어렵다. 박 대통령은 “통일을 준비하는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소명”이라고 했지만, 남북관계를 풀지 못하는 한 공허한 수사일 뿐이다. 남북관계가 진전되지 않으면 북한이 핵을 포기할 가능성도 줄어든다.
일본에 대해서는 내년이 국교정상화 50주년임을 상기시키면서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노력과 결단을 촉구했다. 하지만 이날 일본 정부 각료들과 80여명의 국회의원이 보란듯이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했다. 아베 신조 총리는 참배는 하지 않았으나 자신의 이름으로 신사에 공물료를 납부했다. 박 대통령은 대일 비판의 톤을 낮췄으나 일본은 들은 체도 하지 않은 것이다.
광복절 경축사는 대북·대일 정책의 새 방향을 제시하는 통로로 나라 안팎의 주목을 받아왔다. 특히 올해는 그런 필요성이 더 큰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알맹이가 빠진 경축사가 된 것은 문제의식과 전략적 사고가 부족했기 때문으로 볼 수밖에 없다.
정부는 남북관계에서 기존 접근방식만을 고집할 게 아니라 북한이 호응할 수 있는 실질적 조처들을 폭넓게 검토해야 한다. 특히 남북관계의 기본이 교류·협력임을 인정한다면 5·24 조치 완화·해제와 금강산 관광 재개 문제를 피해갈 수는 없다. 박 대통령이 언급한 환경·민생·문화 협력도 상당 부분 5·24 조치와 충돌한다. 정부가 지금과 같은 태도를 고수한다면 지난 11일 제안한 고위급 접촉이 이뤄지더라도 눈에 띄는 성과를 내기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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