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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사설] 박 대통령의 ‘정치 보복’ 아니라고 할 수 있나

등록 2014-12-21 18:07

2012년 12월10일 서울 여의도 KBS에서 열린 제18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 TV 토론회에서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선 후보,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가 토론회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국회 사진기자단
2012년 12월10일 서울 여의도 KBS에서 열린 제18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 TV 토론회에서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선 후보,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가 토론회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국회 사진기자단
통합진보당 해산은 박근혜 대통령의 ‘작품’이다. 비극적 드라마를 실행에 옮긴 것은 헌법재판소지만, 이를 총감독하고 연출한 사람은 바로 박 대통령이다. 취임 이후 별다른 업적도 없던 그가 대통령 당선 2돌에 맞춰 내놓은 ‘최대의 업적’은 바로 진보당 해산이라는 ‘민주주의 일대 후퇴’였다.

박 대통령은 헌재 결정에 대해 “자유민주주의를 확고하게 지켜낸 역사적 결정”이라고 평가했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둘러싼 학문적 논란은 일단 제쳐두고라도 이번 헌재 결정에서는 어떤 ‘자유’도 ‘민주주의’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침해당하고, 표현과 결사의 자유는 무참히 꺾였으며, 국민의 선택권에 기초한 대의민주주의는 철저히 부정되고 말았다. 박 대통령이 자신의 작품을 자화자찬하고 싶다면 차라리 “반공 민주주의의 승리”라는 말로 수정하는 게 낫다.

사실 박 대통령이 진보당 해산을 밀어붙인 의도는 애초부터 민주주의 보호나 헌법적 가치의 수호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진보당이 우리 사회의 커다란 위협세력이 못 된다는 것은 세상이 아는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내리막길을 걸어온 진보당은 이른바 ‘이석기 내란 음모 사건’으로 이미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이 굳이 진보당을 공중분해시키겠다고 칼을 빼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진보당에 대한 개인적인 혐오감과 정치 보복의 일념 말고는 다른 해석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다시 떠오르는 대선 당시 토론회 장면

이번 헌재 결정이 있고 나서 많은 사람이 2012년 12월4일에 있었던 대선 후보 텔레비전 토론회를 떠올렸다. “박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나왔다”고 공언하며 박 대통령을 신랄하게 공격하던 이정희 진보당 후보, 그리고 그를 쏘아보던 박 대통령의 분노에 찬 눈빛을 기억한다. 박 대통령은 때맞춰 국가정보원이 터뜨린 이석기 사건을 놓치지 않고 법무부를 동원해 정당해산심판 청구를 강행했다. 친여 보수세력 일변도로 짜인 헌재가 당연히 자신의 뜻을 따를 것이라는 확신이 서 있었을 것이다. 헌재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진돗개는 한번 물면 살점이 완전히 뜯어져 나갈 때까지 안 놓는다”는 본인의 말처럼, 박 대통령은 자신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상대를 끝까지 물어뜯어 숨통을 끊어놓는 무서운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이 과정에서 국가 최고지도자가 지녀야 할 자질과 덕목의 결여도 함께 보여주었다. 포용력과 관용,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각, 정치적 소수자에 대한 배려, 과거를 덮고 앞으로 나아가는 미래지향적 사고 등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가장 절실한 과제인 화해와 통합에 대한 국민의 염원은 완전히 내팽개쳤다. 오직 정적에 대한 불타오르는 적개심과 졸렬한 복수심만 번득일 뿐이다. 그리고 그 적개심이 부른 우리 사회의 후유증은 참으로 심각하다.

커지는 국내 갈등과 국제적 비판 여론

당장 이번 사건으로 우리 사회는 씻기 힘든 심각한 분열과 갈등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헌재 결정 ‘찬성파’와 ‘반대파’ 간의 대립과 갈등은 앞으로 오랜 세월 결코 접점을 찾지 못하고 평행선을 달릴 것이다. 심지어 일베 등 일부 극우세력들은 헌재 재판관 중 유일하게 반대 의견을 낸 김이수 재판관을 향해 “까보전”(까고 보니 전라도) 따위의 입에 담지 못할 막말까지 하고 나섰다. 철없는 극우세력의 망동은 참으로 개탄할 노릇이지만, 그들을 탓하기에 앞서 이런 상황을 초래한 근본적 책임은 바로 박 대통령에게 있다.

비선 세력 국정개입 의혹 등으로 가뜩이나 국제사회의 조롱거리가 된 한국은 이번 사건으로 이미지가 더욱 추락했다. 국제앰네스티와 휴먼라이츠워치 등은 “21세기 민주주의 국가 대통령이 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일” 등의 신랄한 비판을 일제히 토해냈다. 게다가 세계헌법재판기관 회의체인 ‘베니스위원회’가 진보당 정당해산심판 결정문 제출을 요청하고 나섬으로써 헌재 결정은 국제적 심판대에까지 올랐다. 국제사회의 이런 비판에 박 대통령은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한국적 민주주의의 특수성”이나 운운할 것인가. 어쩌다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손가락질을 받는 신세가 됐는지 부끄럽고 답답할 뿐이다.

박 대통령은 이번 헌재 결정으로 비선 세력 국정개입 의혹 등 ‘정치적 악재’를 덮게 됐다고 회심의 미소를 지을지도 모른다. 보수세력의 재결집으로 추락한 지지도를 만회할 수 있다는 주판알도 튕기고 있을 것이다. 현 정권이 앞으로 공안통치의 고삐를 더욱 죌 것이라는 징후도 곳곳에서 관측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 실패가 덮이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인다. 무리수는 또 다른 무리수를 낳으며 결국 더욱 빠져나오기 힘든 수렁에 빠져들 뿐이다. 다만 한가지, 박 대통령의 앞날에 정확한 것은 있다. 바로 아버지에 이어 ‘민주주의 후퇴의 이정표를 세운 대통령’으로 역사에 영원히 기억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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