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는 자신을 “헌법을 수호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지켜주는 곳”이라고 밝히고 있다. ‘인권과 민주주의의 보루’ 혹은 ‘국가권력의 자의적 권력남용을 통제한다’는 데서 헌재의 존재 의의를 찾기도 한다. 1987년 민주화의 산물인 헌재에 대한 기대는 다른 어느 국가기구보다 높았다. 지금 헌재는 과연 그런가.
헌정사상 최초인 19일 헌재의 통합진보당 강제해산 결정은 헌재가 자신의 존재 이유와 위상을 스스로 허문 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이유는 자명하다. 무엇보다 헌재가 ‘헌법’ 대신 ‘북한’을 판단의 근거와 기준으로 삼아, 헌법과 헌법정신의 유보를 감행했기 때문이다.
헌재가 밝힌 대로, 정당해산은 ‘민주적 기본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끼칠 구체적 위험이 분명할 때만, 최후의 수단으로 적용돼야 한다. 민주적 기본질서는 국민주권주의, 기본적 인권의 존중, 권력분립, 복수정당 제도 등 우리 헌법의 핵심 가치를 내용으로 한다. 헌재도 인정하는 대로다. 그런데 헌재는 진보당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당장 얼마나 심각한 해악의 위험을 끼쳤는지 논증하는 대신, 시종 ‘북한 추종성’을 정당해산의 사유로 내세웠다. 북한과 연계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어도 비슷한 주장을 폈으니 북한 추종의 ‘숨은 목적’이 있다고 추정했고, 일부의 북한 동조 발언이 있었으니 위험성이 드러났다는 논리 비약을 예사로 구사했다. 이석기 그룹 등의 형사처벌로는 모자라 정당해산까지 굳이 해야 하는지를 따지는 데서도, 헌재는 “북한이라는 반국가단체와 대치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특수한 상황”을 이유로 내세웠다. 그런 “비상상황”에서는 헌법과 법률에 근거가 없어도 국회의원직 박탈까지 선고할 수 있다는 것이 헌재의 주장이었다.
존재 부정한 ‘2류 헌재의 3류 판결’
북한만 내세우면 헌법까지 유보되고 포기돼도 좋다는 주장이야말로 유신이나 5공 등 권위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헌재는 일부의 국가보안법 위반 행위가 정당 전체의 민주적 기본질서 위배라는 극심한 논리적 비약을 함으로써 2014년의 대한민국을 긴급조치 시대의 비정상 국가로 퇴행시켰다. 그 결과가 법적 근거도 없이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의 자격을 박탈한 국민주권주의의 무력화, ‘숨은 목적’ 따위를 따지는 자의적 사상검증으로 인한 표현과 결사의 자유 등 기본권의 심각한 침해, 관용과 다원성을 외면한 강제적 정당해산으로 인한 복수정당제의 퇴색이다. 그 하나하나가 다 민주적 기본질서의 요소이니, 헌재야말로 민주체제를 위태롭게 한 셈이다. 권위주의 시대의 종식으로 탄생한 헌재가 그랬으니 스스로 존립근거를 허문 것이기도 하다.
헌재의 다수의견이 법률 전문가의 논리라기엔 부끄러울 정도라는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헌재 결정문은 정당해산의 엄정한 법리와 입헌민주주의의 원칙을 선언하면서도 정작 이를 사건에 적용하는 데서는 그런 원칙을 내팽개쳤다.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정당해산의 법원칙과 규범을 의도적으로 적용하지 않았고, 사실관계에 대한 증거가 확정되지 않았는데도 예단과 추론을 남발했다. 일부의 행위를 당 전체의 활동으로 간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명백한 국제규범이고 사법적 판단의 기본인데도 헌재는 눈을 질끈 감고 침소봉대를 강행했다. 그런 결정이 결국 정치권력의 이해와 입맛에 맞는 것이었으니, 헌재가 국가권력의 자의적 권력남용을 통제하기는커녕 되레 권력에 힘을 빌려주며 영합한 게 아니고 뭔가.
기울어진 운동장의 편파 심판
헌재가 아무런 권한도, 근거도 없이 통합진보당 소속 국회의원들의 의원직을 박탈한 것도 심각한 월권이다. 헌법과 현행법으로 국회의원직 상실은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에 의한 제명이나 선거법 위반에 대한 당선·선거무효 판결로만 가능하다. 정당해산으로 국회의원직을 박탈할 수 있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헌법 교과서는 이에 더해 “공직선거법은 전국구 의원(비례대표 의원)의 경우에도 정당해산 시에는 국회의원직을 상실한다고 규정하지 않고 있다”(김철수 <헌법학개론>)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도 헌재는 “국회의원직을 그냥 두면 정당해산 결정의 실효성을 확보할 수 없다”며 의원직 박탈을 결정했다. 이런 행위야말로 ‘헌법에 의해 설치된 국가기관의 권능 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국헌문란’이라는 비난이 나올 만하다.
헌재는 이번 결정으로 무의미한 이념 대결을 종식시키자고 주장했지만, 갈등과 대립은 해산 결정 이후 더 확산될 조짐이다. 지금 같은 헌재가 헌법 문제의 최종적 판정자에 어울리느냐는 의구심도 커지고 있다. 헌재가 일반 시민들의 여론 분포나 법 감정보다 훨씬 보수적이고 편향된 결정을 내린 데 대해선, 헌법재판소 재판관의 임명과 구성 방식부터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지금 방식으로는 보수 성향의 현직 고위법관이나 검찰 고위직 등 사법관료로만 헌재가 충원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대통령과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대법원장과 집권 여당이 재판관 9명 중 7명을 임명하는 방식으로는 보수성은 피하기 어렵다. 우리 헌재의 모델이 된 독일 헌재처럼 국회의 3분의 2 의결로만 재판관을 임명하도록 해 정치적 편향성을 줄이는 한편, 사법관료 외의 인사들도 재판관으로 임명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변화를 모색할 때다. 헌재 등 사법부에 정치적 현안과 중요한 일의 처리를 떠넘겨 핑계로 삼으려는 정치권력의 악습도 고쳐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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