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과거 국가가 저지른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을 거부하는 판결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2일 유신헌법에 반대하다 불법연행돼 고문 끝에 조작된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소설가 이호철씨 등이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민주화보상법)에 따라 보상을 받았으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수사기관의 불법행위로 인한 피해 역시 민주화운동 관련 피해이므로, 피해에 대한 생활지원금 등을 받았다면 따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전에도 대법원은 ‘보상금 등의 지급에 동의하면 재판상 화해가 성립한 것으로 본다’는 민주화보상법 규정을 들어, 지원금을 받았으면 더는 손해배상 대상이 아니라는 태도였다. 이번엔 더 나아가 불법구금과 고문, 조작 등 불법행위가 확인돼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돼도 마찬가지라고 판결했다. 형식논리에 기대 ‘국가 폭력’에 면죄부를 준 셈이다.
이런 판결은 부당하다. 보상금·생활지원금 등은 불법 여부에 관계없이 지급되는 손실보상으로,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과는 성격이 다르다. 무죄 확정 뒤 피해자의 억울함 등은 이전보다 훨씬 커졌을 것이다. 생활지원금은 그 피해를 배상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과거사 사건에서 높은 위자료를 인정해온 법원이 이제 와서 합리적 이유도 없이 국가배상 청구권을 제한하는 것은, 소수의견 지적대로 공평과 정의의 관념에도 어긋난다.
판결의 근거 조항에 대해선 이미 하급법원이 위헌이 의심된다며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다. 위헌 결정이 내려지면 국가배상 청구사건 수백 건의 판결이 바뀐다. 그런 터에 대법원이 굳이 헌재를 앞질러 무리한 기준을 내놓은 것이다.
대법원은 지난해 10월에도 유신 때 긴급조치를 적용한 처벌 자체는 불법행위가 아니라고 밝혔다. 이를 따라 서울고등법원은 긴급조치 피해자에게 국가가 배상할 책임이 없다고 판결했다. 법원이 위헌·무효인 긴급조치까지 편든 꼴이다. 이런 퇴행을 거듭하면서 어떻게 민주주의와 인권의 보루일 수 있는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