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은 지금 어느 때보다 큰 위기를 맞고 있다. 대선개입 댓글 공작이 사실로 확인돼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유죄 판결을 받으면서, 국정원의 존립 근거는 근본에서부터 흔들리게 됐다. 간첩사건 증거 조작으로 관련자 전원이 실형을 선고받아 대공수사기관의 위상과 자격도 의심을 받고 있다. 대북·해외 정보가 늦고 부정확하다는 말을 종종 듣고 있고, 정치적 필요로 괜한 정보를 공개해 스스로 정보력을 손상시키기도 했다. 정보기관이라기엔 부실하고 수사기관이라기엔 불법적이라는 조롱과 비판은 이미 오래됐다. 국정원이 정치권력의 이해만 좇는 음모적 권력기관이라는 국민 불신은 갈수록 커지는 양상이다.
새로 국정원장을 임명한다면 이런 고질에 걸린 국정원을 근본적으로 바꿀 사람이어야 한다. 그 방향도 분명하다. 국내 부문을 과감히 정리해 정치개입의 싹을 도려내고, 국가이익에 직결되는 대북·해외 정보에 집중하는 일류 정보기관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문제가 불거진 지금이야말로 개혁의 좋은 기회일 수 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이런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 버렸다. 27일 내정 발표된 이병호 국정원장 후보자는 국민이 열망하는 국정원 개혁에 적합한 인물이 전혀 아니다.
이 후보자는 공개적으로 국정원 개혁을 반대해온 사람이다. 그는 대선개입 댓글 사건으로 국정원 개혁 요구가 거세던 2013년 이후 여러 차례 신문 기고를 통해 “국정원을 지속적으로 때리고 흔드는 것은 백해무익한 자해행위”라거나 “국정원의 무력화를 줄기차게 노려온 북한을 결과적으로 돕는 셈”이라는 등의 말로 국정원 개혁 움직임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해묵은 냉전시대의 잣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논리를 앞세워, 국정원 개혁은커녕 되레 국정원의 기능과 권한 확대를 앞장서 주장했다. 국정원의 정치개입 범죄도 국정원장 개인의 일탈로 애써 돌리려 했다. 이런 사람이 국정원 개혁을 제대로 할 리 없다.
공권력을 절대시하고 옹호하는 사고방식은 더욱 위험하다. 그는 2009년 용산 참사 직후 신문 기고문에서 용산 참사를 ‘폭동’에 비유하고 참사의 희생자를 ‘불법을 저지른 사람들’로 지칭하면서, “법 집행은 글자 그대로 추상같아야 한다”고 경찰의 과잉진압을 정당화했다. 국민의 인권과 생명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비인간적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이에게 권력의 칼자루가 쥐어진다면 공권력의 이름으로 또 다른 비극이 빚어질 위험은 그만큼 커진다. 이병호 국정원장 내정은 마땅히 재고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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