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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사설] ‘문화 융성’ 정책과 어긋나는 번역사업 홀대

등록 2015-03-04 19:09

외국의 고전과 중요한 학술서를 번역해 보급하는 국가 번역사업이 심각하게 홀대받고 있다. 정부 지원 국외 고전 번역사업을 담당하는 유일한 공공기관인 한국연구재단 자료를 보면, 명저 번역 지원사업 예산과 과제 수가 지난 몇년 새 크게 줄고 있다. 올해 사업 예산은 고작 10억6300만원으로 2011년 24억원의 절반도 안 된다고 한다. 같은 기간 과제 건수도 89개에서 24개로 줄었다. 한해 사업 예산 10억여원은 이공계 연구과제 1건 지원과 맞먹는 수준이니 ‘국가사업’을 한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다.

번역은 무엇보다 지식을 대중화하고 민주화한다는 차원에서 의미가 크다. 학문이나 지식 향유 활동이 특정한 소수에게 독점되지 않고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는 뜻이다. 가령 서양의 고전 철학서를 번역해 놓으면, 우리말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그 철학을 논의하는 데 참여할 수 있다. 어떤 저작이 번역되어 있지 않다면, 그 저작을 외국어로 읽을 수 있는 사람만이 지식을 독점하고 자신이 해석한 지식을 일방적으로 대중에게 부과할 수 있게 된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들은 예산 협의 단계에서 “학자들이 영어로 읽을 수 있는데 굳이 예산을 들여 번역할 필요가 있느냐”고 주장했다고 한다. 번역이 시민들한테 갖는 지식 대중화, 민주화 차원의 깊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태도다. 최만리와 같은 학자들이 한글 창제를 반대하면서 드러낸 얕은 생각과 별로 다를 게 없다.

번역사업은 학술 발전의 기초가 된다. 학문은 모국어로 연구하는 게 외국어로 연구하는 것보다 훨씬 쉽고 경쟁력을 발휘하기 좋다. 외국과 우리나라 양쪽의 문화적 맥락을 고려해 잘 번역한 저작물이 제공된다면, 외국어를 익히느라 그리고 외국어로 된 원서를 읽느라 들이는 수고를 많이 덜 수 있기 때문이다. 일찍부터 외국 명저 번역에 앞장서온 일본이 꽤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지만, 우리나라는 평화상 1건 말고 학술상은 내지 못한 점을 생각해볼 일이다.

정부는 이제부터라도 국가 번역사업 예산을 크게 늘리기 바란다. 번역 지원사업을 지금처럼 한국연구재단에 맡기면 충분한지, 아니면 별도의 전담기관을 두는 게 적당할지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출판인이나 학자들도 번역 지원사업 과제를 선정할 때 학술적 가치와 대중성을 함께 고려하여 사업의 저변을 넓힐 필요가 있다. 정부와 출판계, 학계 모두 명저 번역은 국민이 지식을 향유할 보편적 권리를 충족시키는 의미깊은 사업임을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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