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사설

[사설] 대통령 비판 전단에 대한 ‘호들갑 수사’

등록 2015-03-08 18:37

예전에 벽서(壁書)라는 게 있었다. 혹은 괘서(掛書)라고도 불렀다. 특정 인물이나 체제를 공격 대상으로 삼아 원망·비난하는 글을 써서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 붙인 것이다. 주로 집권층의 실정이 잦고, 사회의 언로가 막혀서 백성의 뜻이 제대로 위로 전달되지 못할 때 빈번히 일어났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는 내용의 전단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전국 곳곳에 뿌려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괘서 사건이란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정보가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유통되는 첨단 온라인 시대에 이런 전단지들이 유행하고 있는 것 자체가 주목할 만한 사회현상이다. 이는 우선 아날로그적인 방식이 오히려 사람의 눈길을 끌면서 주장 전달의 효과가 높아지는 측면이 고려됐을 것이다. 특히 온라인을 통한 권력 비판에 수사당국이 명예훼손이나 모욕죄의 칼날을 휘두르는 사례가 늘어난 것은 전단지가 유행하게 된 중요한 이유로 보인다. 어쨌든 유신시대를 풍미했던 민주화 요구 유인물이 형태와 내용을 달리하면서 박근혜 대통령 시대에 재연된 것은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조선시대에 괘서 사건은 ‘대역부도죄’로 간주해 엄히 처벌했는데, 요즘 경찰이 하는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법률상으로는 기껏해야 경범죄(쓰레기 무단투기)나 건조물침입죄 따위에 해당하는데도 경찰은 심각한 흉악범죄 내지는 공안사건 다루듯이 하고 있다. 전단 제작자 집을 압수수색해 컴퓨터 파일과 휴대전화 등을 가져가는 것은 기본이고, 경범죄만으로는 모자라 명예훼손 혐의마저 적용했다. 국정원 대선개입 유죄판결이나 박 대통령의 대선공약 파기 등 ‘사실’에 근거해 권력자를 비판하는 행위를 명예훼손으로 규정한 것도 납득할 수 없지만, 당사자(박 대통령)가 처벌을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경찰이 반의사불벌죄인 명예훼손죄를 적용한 것은 난센스가 아닐 수 없다. 심지어 경찰은 오토바이 불법개조를 문제삼아 자동차관리법 위반 혐의까지 적용했다고 하니 치사하고 찌질하기 짝이 없다.

경찰로서는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것이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하는 길이라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병아리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들고 설치는 꼴은 참으로 보기 민망하다. 청와대와 경찰에 권고하는데, 민주사회에서 대통령에 대한 풍자와 비판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것이 상책이다.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고 집권층과 백성 간의 의사소통이 원만히 이뤄질 때 벽서가 뜸해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