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시절 국민의 자유를 짓밟는 도구였던 긴급조치는 2013년 대법원 판결로 위헌으로 선언됐다. 그런데 이 긴급조치를 발동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행위는 아무런 불법행위도 아니라는 대법원 판결이 26일 나왔다. 앞뒤가 맞지 않는 황당한 판결이자 시대를 거스르는 퇴행적 판결이다.
앞서 대법원은 지난해 10월 ‘긴급조치가 당시로서는 유효한 법규였던 만큼 이를 따른 공무원의 직무행위가 곧바로 불법행위에 해당하는 건 아니다’라는 판결을 내놔 비판을 받았다. 경찰·검찰 등이 영장 없이 무고한 시민을 체포·구금했어도 공무원으로서 당시의 실정법인 긴급조치를 집행해야 하는 처지였으므로 불법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극히 형식적이고 몰역사적인 논리였다. 하지만 이에 근거하더라도 대통령의 긴급조치 발동 행위는 불법성이 인정될 수 있었다. 주어진 의무에 따라 행동한 다른 공무원들과 달리 대통령은 국정의 최정점에서 그 스스로 위헌적인 긴급조치를 내렸기 때문이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이마저도 부정했다.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로서 대통령은 이에 대해 정치적 책임을 질 뿐 아무런 법적 의무도 지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이런 논리라면, 독재자가 아무리 위헌적인 조처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탄압하더라도 사후적으로 법적 책임을 묻지 못하고 국민의 피해도 구제받지 못하게 된다.
반면 2심 판결은 국가긴급권 행사가 원칙적으로 정치적 책임만 지는 행위이더라도 그 내용이 명백히 헌법에 위반되는 경우에는 위법행위가 인정된다고 봤다. 대통령에게는 헌법수호의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는 유신헌법에 비춰 보더라도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도 반하는 명백한 위헌이므로 대통령에게 고의 또는 과실이 인정된다는 게 2심의 결론이었다.
대법원과 2심 판결을 비교하면 누가 봐도 2심의 설득력이 높아 보인다. 판결문을 보면 대법원은 2심의 논리를 제대로 반박하지도 않은 채 서둘러 정반대의 결론을 냈다. 이러고도 인권의 최후 보루로서 국민의 기본권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지키는 대법원의 책무를 다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이번 판결은 과거 독재체제에 면죄부를 주는 동시에 미래의 독재자에게 법리적으로 뒷문을 열어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독재정권 아래에서 박종철씨 고문치사 사건을 제대로 수사하지 못한 박상옥 검사가 대법관 후보자로 제청된 상황까지 겹치니 대법원의 민주주의 인식에 심각한 의문을 떨칠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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