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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사설] 역사인식까지 재단하겠다는 가당찮은 판결

등록 2015-04-03 18:37수정 2015-04-03 18:37

교육부가 고교 한국사 교과서를 독재 미화 등의 방향으로 고치도록 출판사에 명령한 것은 정당하다는 판결이 2일 나왔다. 법원은 30가지에 이르는 교육부의 수정명령이 모두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이처럼 법원이 역사인식과 서술의 옳고 그름을 심판하겠다는 태도부터가 적절하지 않다.

예를 들어 수정명령 중에는 “피로 얼룩진 5·18 민주화 운동”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다니!” 등의 소제목이 지나치게 자극적이어서 교과서의 품격에 적합하지 않다는 항목이 있다. 쿠데타 세력이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총칼로 무참히 살육한 사건이 5·18인데 “피로 얼룩진”이란 표현이 지나치다는 건 도대체 무슨 말인가. 독재정권이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대학생 박종철씨를 물고문해 죽이고도 “책상을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파렴치한 거짓말을 ‘공식 발표’했는데 이를 그대로 교과서에 싣는 게 도대체 무슨 품격에 어긋난다는 것인가. 이런 사안에 대해 일개 재판부의 주관적 판단이 교과서 내용을 좌우하는 건 가당찮은 일이다.

법원은 법적 다툼의 전제가 되는 사실을 판단할 권한이 있지만, 이는 제출된 증거에 근거해 가능한 한도에서 사실 여부를 가린다는 의미이지 역사적 진실까지 확정할 권한은 아니다. 더구나 광범위한 사료를 어떻게 해석·서술할지는 법이 아니라 학문의 영역이다. 획일화한 ‘관제 사관’을 강요하지 못하도록 교과서의 다양성·중립성을 보장하는 검정제도가 마련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법원은 교육부의 수정명령 내용보다는 그 절차적 정당성 여부를 철저히 따지는 데 주력했어야 한다. 그런데 이마저도 어설픈 논리로 일관했다.

이미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를 쉽게 수정할 수 있다면 정권의 입맛이나 시류에 영합한 교과서 수정이 일상화할 위험이 있다. 대법원 판례도 같은 취지에서 교과서 수정은 애초의 검정에 준하는 엄격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판시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의 수정명령은 통상 8개월에 이르는 검정 절차와 달리 2주 만에 나왔고, 심의 내용도 공개되지 않았다. 검정에서 합격한 교과서를 다시 수정해야 할 만큼 논쟁적인 내용을 달랑 2주 만에 제대로 심의했을지 의문이다. 심의에 참여한 이들이 자신의 인적사항조차 공개되길 꺼렸다는 것도 우습다. 그러고도 심의의 공정성·객관성이 담보됐을까. 이번 판결은 이런 의문에 아무런 답도 주지 못하고 있다. 수정명령의 내용·절차에 대한 판단 모두 승복하기 어려운 판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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