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구 국무총리가 20일 밤 박근혜 대통령에게 사의를 전했다. 박 대통령은 해외순방에서 귀국하는 대로 사표를 수리할 것으로 예상된다. ‘식물 총리’의 볼썽사나운 처신을 둘러싸고 나라가 시끄러웠는데 늦었지만 다행이다. 그러나 이 총리 사퇴로 문제가 끝난 건 아니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남긴 리스트에 대한 검찰 수사는 이제야 막이 올랐다. 이 총리 사의는 진실 규명을 위한 시작일 뿐이다.
이완구 총리의 진퇴 문제가 이처럼 확대되면서 국정의 걸림돌로 작용한 데엔 이 총리 개인의 처신뿐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의 잘못된 대응 탓이 적지 않다. 박 대통령은 해외순방을 떠나기 전에 이 총리를 경질했어야 했다. 출국 당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이 총리 거취를 논의하고도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은 박 대통령의 어정쩡한 선택이 국정 혼선과 갈등을 가중시켰던 셈이다. 민심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순응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청와대와 여권이 깨달았길 바란다.
이 총리의 사의 표명으로 검찰 행보는 한결 가벼워졌다. 대통령이 없는 상태에서 국무총리를 수사해야 하는 어려움이나, 사상 처음으로 현직 총리를 소환조사해야 하는 부담이 사라졌다. 이젠 검찰 스스로 말했듯이 “수사 논리와 원칙에 따라” 좌고우면하지 말고 철저하게 수사하면 된다. 청와대나 정치권 눈치를 보거나 압력에 휘둘리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최근 청와대와 법무부가 수사 방향에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주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많은 국민의 우려를 검찰은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박 대통령은 이 총리 사의 표명 보고를 받고 “검찰은 정치개혁 차원에서 확실히 수사해 모든 것을 명백히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은 국회에서 “(리스트에 오른) 8명이 출발점이지만 불법 정치자금 전반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답변했다. 보수언론들은 이를 ‘여야 구별 없는 고강도 사정’을 예고한 걸로 해석한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좀더 노골적으로 “야당 대선자금도 수사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건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따져보면 ‘여야 가리지 않는 수사’를 지금 얘기하는 것은 옥석을 제대로 가리기보다 물타기를 하자는 것과 같다.
이번 사건의 핵심은 한 기업인이 정권 실세들에게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했지만 배신당했다고 느끼자 그 사실을 폭로하고 자살한 것이다. 성 전 회장이 자살하기 전 거의 매일 만났던 진경 스님은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성 전 회장이 2007년 한나라당 경선을 자기가 낸 경비로 치렀다고 했다. … 2012년 대선 때도 돈과 몸, 조직까지 다 바쳐 당선시켰는데 이럴 수 있느냐고 성토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성 전 회장은 이완구, 홍준표, 김기춘 등 8명의 리스트를 작성했고, 죽기 직전 좀더 자세한 내용을 언론사에 털어놨다. 그의 말을 뒷받침하는 정황들은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면 검찰 수사는 우선 이 리스트에 오른 8명에 집중해야 옳다.
물론 수사 과정에서 새로운 혐의가 포착되면 당연히 수사해야 한다. 하지만 그건 그때 가서 하면 될 일이지 벌써 “여야 모두가 수사 대상”이라는 식으로 미리 떠들 필요가 없다. 검찰은 누구의 지침에 따른다는 인상을 주는 수사를 해선 절대 안 된다. 8명이 아니라 80명을 수사한다 해도 국민이 고개를 저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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