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2일 과거 일제 침략과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을 교묘하게 피해 나가는 연설을 했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반둥회의 60돌 기념 아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에서다. 2012년 말 취임 이후 계속해온 ‘역사 뒤집기’를 국제무대에서도 시도하는 모습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이런 잔꾀는 용납될 수 없다.
아베 총리는 ‘지난 대전에 대한 깊은 반성과 함께 반둥에서 확인된 원칙을 지키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2차대전 훨씬 이전부터 시작된 아시아 침략과 식민지배를 ‘지난 대전에 대한 반성’이라는 표현으로 얼버무린 것이다. 다른 2차대전 참전국들까지 끌어들여 자신의 책임을 희석시키려는 것이기도 하다. 반둥회의 원칙을 거론한 것은 ‘일제 침략’이라는 직접적 표현을 피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 원칙은 ‘침략 또는 침략 위협, 무력에 의해 타국의 영토 보전이나 정치적 독립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등 10가지를 내용으로 한다.
아베 총리는 20일 일본 국내 방송에 나와, 8월15일 종전 70돌을 전후해 발표할 ‘아베 담화’에 ‘침략, 사죄’ 등의 표현을 담을지에 대해 “(이전의 담화와) 같은 것이면 담화를 낼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과거 잘못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더는 거론하지 않겠다는 태도다. 그의 집권 기간 동안 군대위안부 강제성 부인, 교과서의 역사 왜곡, 독도 영유권 주장 등이 지속적으로 강화돼왔다. 자위대의 집단적 자위권을 확대하고 평화헌법을 부인하는 개헌을 추진하는 것도 같은 흐름에 있다. 그는 이런 역사 뒤집기를 ‘적극적 평화주의’ 등으로 포장하고 있다.
아베 총리의 이런 시도는 아시아 나라들과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국제 협력에 걸림돌이 될 것이 확실하다. 미국 하원의원 4명이 21일 본회의장 특별연설에서 아베 총리에게 ‘과거사를 진정으로 반성하고 사과하라’고 촉구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이들은 특히 아베 총리가 29일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잘못을 명백하게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이날 연설을 지켜본 것은 상징적이다. 위안부 강제성 부인은 한-일 관계 정상화를 막는 최대 걸림돌이다.
아베 총리는 미래를 내다보자고 말하지만 과거를 직시하지 않으면 올바른 미래도 있을 수 없다. 뒤집힌 역사 위에 구축되는 미래는 더 큰 역사적 불행을 낳을 수 있다. 아베 총리는 종전 70돌이라는 좋은 기회를 흘려보내지 말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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